[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동백은 필 줄을 모르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춥다. 날마다 춥다. 올해는 동백조차도 추위를 엄청나게 타는 모양이다. 때가 되면 눈 속에서도 의연하게 피어나던 동백이 올해는 당최 필 생각을 안 한다. 영문도 모르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 피의자의 억울한 분노처럼 굳게 앙다물려 있는 동백 꽃봉오리를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알싸하다.

그런데도 매화는 피었다. 처음에는 그게 꽃이라도 생각도 차마 해보지 못했다. 매화나무 가지에 뭔가 희끗한 게 보여서 이상한 쓰레기가 날아온 건가 했다. 가서 보니 꽃이다. 어이가 없다. 전날에 핀 꽃들은 이미 얼어서 뜨거운 물에 데친 나무새 같다. 꽃 같지도 않은 이런 꽃에 벌이 날아들 까닭은 없을 테고, 아직은 벌들이 활동할 만한 때도 아니다.

피어야 할 동백은 꼼짝도 안 하고, 때 아닌 때에 매화는 피어버리고 있으니 이게 무슨 재앙인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 가슴 곳곳으로 소름이, 공포가, 불안이 속속 퍼져 나간다. 쥴리언스 반스의 소설 제목이 생각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길한 예감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공부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인간의 멸절을 소재로 한 다큐 한 편을 찾아내서 보고 있는 참인데 우리 집 개 ‘돌프’가 맹렬하게 짖어대는 방식으로 나를 부른다. 울타리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컹컹, 인사를 열심히 하는 오지랖 넓은 취미를 갖고 있는 녀석이어서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시하고자 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완전한 무시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느 순간 짜증이 나서 벌떡 일어섰다. 도대체 뭐냐? 하는 불만 가득한 생각으로 창문에 이마를 대고 힐끗 내다보니 연못 앞에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눈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니다. 화려한 도시 이미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여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렇게 되면 예감이고 뭐고 일단 나가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어 김선생, 아직도 계시는구먼.”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순간 걸쭉한 남성성의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지른다. 이어서 한 남성이 베레모를 머리에 올려놓은 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이 나를 무척 반가워하는 것 같지만, 나는 식별이 안 돼서 어리둥절, 이게 뭐지? 하는 뭐 그런 꼴이 돼서 삐죽삐죽, 어렵게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러다가 어? 하는 순간이 왔다.

“아이고 이거 누구십니까.”

그이와 나는 두 손을 부여잡고 열심히 흔들어대었다. 돌프 녀석은 아직도 맹렬하게, 거의 극악을 다해서 짖어대고 있었다. 연못가에 몰려서 있는 여인들에게 당신들 뭐냐고, 누구냐고 따져 묻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 또한 그 점이 궁금했다. 저 여인들은 어디서 왜 온 거지? 하는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그 뭐냐 내가 정년을 하고 보니 무료하기도 하고, 공부도 더 필요하고 해서, 철학교실을 열었지 뭡니까.”

그러니까 함께 온 사람들은 그이의 제자들이거나,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였다. 오랜만에 마스크도 벗었고, 날씨도 모처럼 얌전하게 화창해서 고창의 해안과 습지, 선운산 등등을 둘러보는 뭐랄까, 일종의 필로소피투어 개념의 나들이를 나선 모양이었다.

어쨌든 반가웠다. 반가웠지만 정답게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볼 시간은 없어 보였다. 나 또한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집안으로 모셔 들일 자신은 없었다. 만나자마자 헤어질 준비를 하며 선 채로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에 니체라는 고유명사가 툭 튀어나왔다. 요즘 철학교실에서 다루는 주제가 니체라는 얘기였다.

니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기억은 타임머신을 타고 있었다. 니체가 아니었다면 그이와 나의 관계는 아마도 소가 닭을 보듯이 건성이었을 것이고, 내가 굳이 그이를 찾아가서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이를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다면 종교와 철학을 나란히 세워놓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어쩌면 가져볼 기회가 내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벌써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해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저기 어디에 서양철학을 전공한 교수가 산다고, 가서 만나보자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갔었다. 대학교수란 직위에 대해서 갖고 있는 내 관념이 다소 냉소적이어서 그리 큰 관심도 흥미도 없는 걸음이었지만, 뜻밖에도 니체의 거대한 망치가 거기에 있었다.

취미가 독서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니체에 관심을 갖지 않은 이 얼마나 될까마는, 나도 한때 니체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말이 좋아서 푹 빠졌지 사실은 겉멋이었다. 문학이든 사회평론이든, 평론을 앞세운 책을 들고 넘기다 보면 그 이름이 곧잘 눈에 띄던 시절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대로, 나는 니체 읽기에 도전했고, 너무 어려워서 번번이 나가떨어지면서도 겉멋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나는 내 우산을 잊어버렸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메모에서 발견한 문장이라 한다. 이 한 줄의 간단한 문장을 놓고 온갖 해석과 억측과 상상이 가해졌다. 자크 데리다는 ‘해석학적 몽유병의 기념비’라는 표현으로 해석불가 판정을 내렸고, 어떤 사람은 접은 우산이란 남근을 상징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니체가 그 시기의 어느 날 성불구가 됐을 거라는 주장 내지 추론을 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키워가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니체는 존재 자체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알 것 같은, 이제 곧 알게 될 것 같은 희망, 선망을 갖게 하는 것이니, 나처럼 겉멋에 빠진 얼치기 독서광들은 그에게서 무궁한 매력과 매혹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화는 피자마자 얼어터지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내게 있어 프리드리히 니체는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우상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는 왜소한 체구에 신경질적인 표정을 하고 있고, 입은 그냥 다물었다기보다 앙다물고 있는 모습이어서, 저 아래 깊은 내부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를 조절하느라 애쓰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상이란 두 번 물어볼 필요도 없이 종교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고, 권력자들은 이 우상을 앞세워서 민중의 등골을 빼먹는다고 니체는 분석한다. 그리하여 그는 거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다.

“이건 비밀 이야기지만 그들은 사람도 아니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 니체는 이어서 그 정체를 ‘보이지 않는 빈혈증의 흡혈귀’들이라고 정리한다. 이 흡혈귀들은 자기 옆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대표 선수들이다. 그러나 민중은 이들의 방약무인을 방약무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위대한 지도자의 증표로 파악하고 넙죽넙죽 절을 하고, 앞을 다퉈 자신의 피를 바친다.

그 당시 니체에 대한 나의 앎은 대충 이런 정도였다. 주마간산이라고나 해야 할 니체에 관한 나의 이런 얼치기 앎에 비하면 그이는 완전 전문가였고, 그것을 인정받아 철학교수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종교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교에 관한 한 그이는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 하지도 말라는 공자의 불가근불가원론을 지지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이는 그 무렵에 새로 안면을 튼 목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목사는 서울에서 제법 큰 교회의 담임을 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여부는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의심할 필요 또한 없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쨌든 목사는 도시에서의 삶을 그만 정리하고 시골에서 작은, 아주 작은 예배당을 꾸려놓고 자연을 노래하며 살고자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에 고창을 발견하고 땅을 매입한 걸로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철학교수도, 마을사람들도,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목사의 출현을 환영했다. 그 신뢰가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계기는 아마도 마을발전기금이었을 것이다. 가난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시골 사람들 가슴으로는 엄두도 못 낼 현금을 목사가 뭉텅이로 내놓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신세계라도 발견한 듯이 목사를 우러러보았고, ‘작은 예배당’이란 말에 흥미를 느낀 철학교수 또한 좋은 친구를 알게 돼서 기분이 매우 좋다는 요지의 환영사를 했다.

그러나 이 견고한 신뢰의 콘크리트는 2년이 채 안 돼서 쩍, 갈라지고 말았다. 징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목사는 실제로 작은 교회와 작은 사택 비슷한 것을 짓기는 지었다. 그런데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목사가 옆에 다른 빈 집을 닥치는 대로 사 들이고, 밭두렁도 사 들이고, 뒤에 산도 사 들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사의 이치란 언제 어디서나 일이 다 끝난 뒤에서야 그 일의 전모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목사는 경험이 많은, 매우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확보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계획을 착착 실천해 나갔다. 마을에 거대한 중장비가 거침없이 드나들기 시작할 무렵에야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때를 같이 해서 목사는 순수한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는 전문 사업가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노인이 많은 농촌이라면 어디든 가라지 않고 찾아가서 노인전문 요양원을 짓고, 다 지으면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얘기였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관련 법인등기도 마쳤고, 건축허가 등 모든 절차를 다 끝내놓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철학교수가 목사를 불러 따지기 시작했다. 작은 예배당 운운한 건 사람을 속이기 위한 잔꾀였던 것이냐고, 성직은 겉치레일 뿐이고 실체는 돈벌이가 목적인 업자일 뿐인 것이냐고. 삼단논법과 인식론을 동원해서 조곤조곤 따져 묻는 철학자를 목서는 용납하지 않았다.

설교대 앞에서 ‘어리석은 양떼’들을 향해 호령하는 목자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목사는 벌떡 일어서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내 돈으로 내 일을 하고자 하는데 네까짓 게 뭔 참견이냐는 요지의 호령이었다. 이에 철학자는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건 목사의 할 일이 아니라 사기꾼의 수법인 거라고 맞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목사의 옆에 있던 사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기억에 남은 것은 사모가 철학자의 여기저기를 마구 할퀴고 꼬집고 물어뜯고 등등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다 동원했다는 것뿐이었다. 철학자에게도 옆에 아내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진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 세상에, 무슨 저런, 저런, 소리만 연발하다가 홱 돌아서고 말았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대한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물론이요 그림자를 느끼는 것조차도 소름이 돋기 마련이다. 철학자는 그 뒤로 한 달이 채 안 돼서 인터넷 부동산에 집을 매물로 내놓았고, 학교가 있는 인근 도시로 완전히 떠나버렸다.

그 뒤로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니, 내 기분이 예사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종교는 덩치가 매우 커졌다. 따르는 사람은 숫자가 줄었다는데 건물은 커졌다. 각종 이권에 개입한다는 뉴스가 이제는 하나도 신기하지 않고, 사회문제에서 종교가 빠지는 일도 거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종교는 돈벌이가 잘 돼서 신나할 거라는 비난까지도 서슴없이 한다.

아무튼 뭐 그렇다. 때 아닌 때에 매화가 피었고, 때가 되었는데도 동백은 필 줄을 모른다. 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과학자들의 예견대로 인류가 실제 멸절한다면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어쩌면 종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예감이 나를 간절하게 유혹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독을, 두려움을, 떨림을 해소하겠다고 나선 종교가 저 지경으로 돈을 신과 동급으로 파악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으로 희망을 삼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아마 내 스스로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니체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그때 이미 인간의 절멸 상태를 예감했던 것이냐고. 그래서 그렇게도 종교를 물어뜯었던 것이냐고.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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