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진의 생각하는 일상]

ⓒ위클리서울/ 김은진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패션의 유행이라는 것은 가만히 지켜보면 참 재미있다. 작년과 올해 초를 휩쓸었던 Y2K 패션의 유행은 내게는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왜냐하면 유튜브에 올라와 있던 2000년대 초반 드라마 영상들에 사람들이 댓글로 ‘옷이 저게 뭐냐’, ‘역시 패션 암흑기’ 같은 말을 적어 놓은 것을 그전에 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런 Y2K 패션의 귀환이라니. 물론 과거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새로운 감수성을 덧입은 모양새이기는 했다. 그래도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성 건강에 해롭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비실용적으로 배가 나오는 크롭 티셔츠와 전문 패션모델의 긴 다리조차 짧아 보이게 하는 7부 바지, 그리고 엉덩이가 보일까 걱정되는 로우 라이즈 바지를 다시 보게 되다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 여러 유튜브 패션 영상에서는 올해 가을과 겨울에 올드 머니 룩이 유행할 것이라 난리들이다. 이 ‘올드 머니 룩’이 무엇이냐면, 서양에서 오랜 부를 누려온 계층이 선호해온 단정하고 깔끔하며 우아한 느낌을 주는 옷차림이다. 브랜드가 노출되지 않고 색감이 튀지 않으며 옷의 소재와 라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용한 럭셔리 룩의 특징이다. 발랄하고 튀는 Y2K 패션에 발레 코어, 바비 코어 같은 리본과 하트 장식이 달린 소녀스럽고 장난스러운 패션 바로 다음에 정반대로 얌전하고 조용하며 보수적인 분위기의 옷차림이 유행으로 돌아오다니 신기했다. 도대체 패션에서 유행이란 것은 누가 만드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몇 년간 유행했던 패션들을 돌아보면 유행의 주기가 확실히 예전보다 짧아진 것 같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덕분에 정보가 전 세계 실시간으로 전달되어서일까. 하지만 그래서 이제 나 같은 일반인들은 유행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가 참 좋아졌다. 어차피 금세 변할 유행인데 열심히 따라잡을 이유가 뭐 있는가. 그러다 보니 이제 유행을 따라잡는 패션은 더더욱 취미와 놀이의 영역에 가까워진 듯 보인다. 새로운 유행에 맞춰 새 분위기의 옷을 입고 밖을 나서면 기분전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즘 유행하는 발레리나 분위기의 발레 코어 룩으로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된 느낌을, 분홍색의 신발과 큰 가짜 보석 장신구가 패션 아이템으로 등장한 바비 코어 룩으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유행과 거리를 두기 쉬워진 이유 중 또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행에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 사람들이 촌스럽다 말했던 것도 언젠가 다시 유행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샌들에 양말을 신는 일은 요즘에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아저씨 패션이라며 조롱을 당했던 차림이다. 또 한동안 분명 여러 패션 유튜버들이 통이 넓은 바지에 굽이 낮고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으면 마치 신발을 안 신은 것 같아 보인다고 혹평했었다. 그런데 1년 뒤에는 요즘 유행이라며 그렇게 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을 자꾸 보면서 나는 점점 유행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유행이 크게 의미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어차피 패션에는 세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기본 아이템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클래식은 영원하다. 기본 청바지와 화이트 셔츠, 반팔 티셔츠와 재킷 같은 것들은 20~30년 전의 세계의 모든 패션 아이콘들이 입었고 지금도 여전히 큰 변화 없이 나이와 국적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입고 있는 그런 옷이다. 나는 많은 옷을 구입하면서 결국 효율적인 옷 입기의 기본은 이 ‘클래식 룩’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변치 않는 기본적인 옷들에 다른 색과 모양의 가방과 모자, 주얼리들을 바꿔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깔끔한 옷 입기는 완성된다. 물론 모든 옷을 기본으로만 구입하면 옷 입기에서 재미는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옷을 통해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행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러니 패션에서 유행은 지난 시대만큼의 파급력을 갖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유행의 주기가 짧아졌고, 더불어 패션 아이템들의 가격대와 디자인이 다양해진 덕분에 이제 한 사람의 패션은 예전보다 더더욱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비슷한 디자인이 있다면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할지 중저가의 제품을 구매할지는 그냥 개인의 선택이다. 유행을 따르는 것도 따르지 않는 것도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개인이 할 수 있는 옷 입기의 궁극적 지향점은 ‘라이프스타일 패션’이 아닐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패션 전문가들이 말하는 ‘스타일’일 것이다. 세계 패션 역사에는 ‘스타일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제인 버킨이다. 그녀는 어떤 옷을 입든 라탄 바구니를 가방으로 갖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사진 속의 그녀만 보았을 때는 패션 연출용 소품 같지만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바구니가 등장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에 여성용 가방은 크기가 작은 것뿐이어서 많은 짐을 넣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납공간이 넓고 가벼운 바구니를 가방으로 이용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장바구니로 쓰였던 바구니를 어디서든 당당히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일상에 그것이 필요했고 제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격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다는 그 유명한 버킨백은 그런 바구니 가방의 이야기를 들은 한 패션 업체 회장이 제작해 제인 버킨에게 선물한 물건이다. 제인 버킨은 버킨백을 아끼지 않고 바구니 가방을 쓰듯 편하게 마구 썼다고 한다. 패션 아이콘들의 스타일이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비싸고 예쁜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옷차림에 그 사람의 삶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패션 유튜브에서 종종 들었던 ‘자신의 스타일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스타일은 그렇게 나의 생활 패턴에 실제로 필요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옷장에 들어가는 옷과 신는 신발의 종류, 가방의 크기, 모자와 액세서리의 모양과 색깔도 단순히 미적 취향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잘 어울리는 것일 때 가치 있고 보기에도 더 좋다는 걸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옷차림일 때 내 몸과 마음 또한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쁜 옷 혹은 유행하는 옷도 내가 자주 입지 않던 것이라면 어색하기 마련이고 보는 사람도 그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옷차림도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 한 사람이 가진 몸짓, 자세, 눈빛, 표정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결국 옷 위로 스며나오기 때문이다. 옷이란 일상에 작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가끔 기분전환할 수 있는 재미를 주며, 시간과 장소에 맞게 예의를 갖추고 나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옷과 패션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이다. 나는 현실에서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옷이라는 물건이 줄 수 있는 이익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입은 옷이 나의 가치관을 적절히 반영하고 내 삶의 방식과 잘 맞는 한에서 아름다워 보일 때, 그것이 진정한 나의 스타일이다.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사진 속 패션모델이나 화면 속 연예인들처럼 예쁜 옷이나 비싼 옷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연예인이나 모델들처럼 얼굴과 몸의 비율이 완벽하지도 않다. 또 SNS 패션인들처럼 유행에 맞는 예쁜 옷을 입은 내 사진을 열심히 찍어 올릴 시간도 돈도 의욕도 없다. 평범한 일반인인 나는 그냥 나다운 모습에서 가진 장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옷차림으로 충분하다. 연출 없이 찍힌 사진 속의 내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더도 상관없다. 제인 버킨의 바구니가 그러했듯 입은 옷이 지금 내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족하다. 그렇게 환상이 사라진 옷차림에서 나는 나만의 스타일과 좀 더 나은 옷장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