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동안 못 다 읽은 독서나 열심히 하자고 책방까지 따로 지었건만,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면 밖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불길한 느낌을 견딜 수가 없어 아무 데로나 쏘다니다보면 몰랐던 사람과 부딪혀서 아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오래 전에 알았으나 더 이상은 안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을 공교롭게 만나 허둥거리기도 한다.

 

영광 한빛원전 입구
영광 한빛원전 입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날 그 남자를 만난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다. 만나고 난 직후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필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와 나는 병원 로비에서 마주치는 순간 서로 깜짝 놀랐고, 몹시 어색한 표정으로 가벼운 목례를 교환했다. 그냥 그대로 돌아서기는 뭔가 뒷맛이 허전하다는 느낌이어서, 자판기 커피라도 함께 마셔야 한다는 이심전심이 작동했던 모양이다.

커피 자판기 앞에 엉거주춤 선 채로 그가 나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후딱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며 그때는 미안했다고, 진실로 미안해서 죽겠다는 듯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선수를 뺏겼다는 기분으로 재빠르게 얼른 아니라고, 내가 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고, 나 또한 가볍게 웃었다.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로 다함께 몸살을 앓고 있을 때였으니 벌써 이십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 시기에 그와 나는 굉장히 적대적이었다. 그는 내가 자기의 이익을 훼손한다고 여기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가 우리 모두의 행복을 침탈해서 개인적 안락을 도모한다고 여기는 입장이었다.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는 나를 발견하면 매우 다양한 조롱과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었고, 쏜살같이 달려와서 발로 허벅지를 걷어차는가 하면 뺨따귀를 후려치고 달아나기도 했다. 나는 그의 그런 폭력적인 언행을 낱낱이 적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고,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거칠게 야비해져 갔다. 그때는 앞날이 캄캄했다. 핵발전소가 만들어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혐오감이, 그 캄캄한 미로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원보다 무섭고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은 역시 돈, 돈이었다. 일천 몇 백 억이라고 하는, 시골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해보기 어려운 돈을 내걸고 핵폐기물 저장시설 공사를 강행하고자 했던 정부가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패배한 이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돌아보면 맹랑한 일이었다. 한수원에서 내건 일천 몇백 억이라고 하는 돈이 곧 자기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이상한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 있었다. 물론 관계자들이 그런 쪽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유도해낸 측면도 있었다. 그런 황당한 오해에 포박된 사람들이 찬성, 절대 찬성을 외치며 반대하는 사람을 빨갱이라 조롱하고 야유하며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발길질을 해대었고, 중립을 표방하는 경찰은 대체로 그냥 멀뚱멀뚱, 아니면 먼 산이나 쳐다보며 시간을 탕진하기 일쑤였다.

 

구시포항에 걸린 현수막
구시포항에 걸린 현수막 영광 한빛원전 입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때 그랬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지금은 나를 보며 그때는 미안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역시 살아 있는 한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배워서 알게 되면 제아무리 완고한 고집으로 무장돼 있었다 해도 생각이 변하는 역동적인 존재인가 보다. 하긴 그게 어찌 사람뿐이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도 생명의 위협을 크게 받고 나면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관찰 보고도 있으니 말이다.

포인트는 역시 사건이요 사고다.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사건, 사고로는 안 된다. 완전히 새로운, 낯설게 새로워서 충격적인, 충격이되 감동과는 거리가 먼, 공포와 불안이 폭풍처럼 몰아쳐서 살이 덜덜 떨리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의 사고를 접하고 나면 생각이 안 바뀔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남자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터졌을 당시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지만, 십 년 세월을 훌쩍 넘긴 아직까지도 수습이 안 되고 있고, 수습은커녕 오히려 위험 수위가 높아져 간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영광 핵발전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핵폐기물 임시저장소 건설 공사 반대투쟁에 온 몸을 던지고 있고, 새로운 현수막을 주문하러 읍내에 나왔다가 현기증이 너무 심해서 영양제를 맞으러 병원에 들렀다는 얘기였다.

‘한빛’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이름을 달고 있는 영광의 핵발전소는 80년대라고 하는 폭압의 시기에 가만히 슬쩍 그러나 재빠르게 들어왔다. 인접한 지역 사람들 중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마 일 퍼센트도 채 안 됐을 것이다. 할 만한 일이 없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도시로 떠나는 변방에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핵발전소는 위험 시설이라기보다 오히려 특별한 혜택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우선 해당 마을 주민들부터가 그랬다. 일단 이런저런 잡다한 일거리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우직하게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알고 우직하게 고기잡이만 하던 사람들이, 집과 땅을 내놓고 떠난다면 시세보다 훨씬 높은 보상을 해준다는 말에 큰 저항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도시로 이사를 가서 대부분 도시빈민이 되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빈민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만져보는 큰돈으로 누구는 작은 여관을 사서 운영하고, 누구는 동네 슈퍼를 사서 운영하고, 누구는 다방을 차리고 누구는 당구장을 차리기도 했지만, 농사 혹은 고기잡이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서비스업이란 너무도 어렵고 험난한 죽음의 길이었다.

 

무장면에 걸린 현수막
무장면에 걸린 현수막영광 한빛원전 입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쨌든 80년대는 표면상 아무 일이 없이 잘 넘어갔다. 이거 혹시 엄청난 괴물덩어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발전소 주변 사람들이 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도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그때까지 핵발전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정도였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정도야 뭐 핵발전소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종류의 공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핵발전소는 그냥 하나의 공장 개념이었다. 여느 공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기를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것 정도였다. 따라서 폐기물 문제는 아직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그것은 아직 꽁꽁 숨겨 있었다. 숨겨 있었기에 그것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핵발전소는 전기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물질도 만들어낸단다. 게다가 그 물질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고, 안 만들어지게 할 방법은 핵발전소 가동을 멈추는 것뿐이란다.

문제는 그 새로운 물질이라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핵폐기물 처리장을 영광에서도 가깝고 고창에서도 가까운 부안군 위도에 짓기로 했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가 나오면서였다. 얼마나 위험한 것이면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땅을 오백 미터씩이나 파서 묻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에 이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한가? 하는 거듭되는 의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관계 당국은 내놓지 못했다.

어디의 누가 어떤 방식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잠깐 유행했던 말이 쓰레기 또는 연탄재 론이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자면 쓰레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연탄을 때고 나면 연탄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것들을 지금까지 어떻게 처리해 왔는가. 태워서 없애기도 했지만 대부분 흙속에 묻었다. 흙속에 묻어놓으면 각종 박테리아가 붙어서 잘게 분해하고, 그러면 흙이 그것을 흡수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압도적인 다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 오백 미터를 거론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십 미터 정도의 십오 층 아파트도 올려다보면 까마득한데 그보다 열 배도 더 깊이 땅을 판다? 핵폐기물이 연탄재 같은 일반 쓰레기와 유사한 것이라면 굳이 지하 오백 미터를, 그것도 단단한 암반을 힘들게 뚫어가면서까지 꼭꼭 파묻어야 할 필요는 대체 무엇인가?

 

해리면에 걸린 현수막
해리면에 걸린 현수막영광 한빛원전 입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관계 당국은 사람들의 이런 심각한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부안군 위도에 설치한다는 폐기물 저장소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폐기물 저장시설이 아니라 임시보관 시설을 영광 핵발전소 단지 내에 만든다는 얘기가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임시 보관소?

사람들은 일단 실소를 터뜨렸다. 돌고 돌아서 결국 그 자리로 온 꼴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은 세상 어디에도 핵폐기물을 둘 만한 곳이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핵폐기물의 무서움을 새삼 실감했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얼렁뚱땅 대충 봉합이나 하고 보자는 관계 당국의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정책이랄 것조차도 없는 정책이 새삼스럽게 한심하고 기가 차서 분통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반대운동밖에 없고 보니 사람으로 산다는 사실 자체가 억울할 지경이었다.

한때는 집만 화려하게 지었을 뿐 화장실이 없다는 말로 핵폐기물 처리 정책을 비유하기도 했지만, 내용이 보다 상세하게 드러난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화장실이 없는 집이라 해도 사람 몸에서 나온 배설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 속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만, 핵발전소에서 나온 폐기물은 다함께 죽자는 염세주의라면 몰라도 살자는 생각이라면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이게 뭔가. 인류는 어쩌다가 이런 재앙덩어리를 품에 안게 되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핵과학자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과학자들 특유의 호기심과 모험심과 자신감 그리고 낙관으로 덮어버렸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발견될 거라는 ‘과학적인’ 자신감으로 일을 벌였지만, 그 뒤로 팔십여 년 세월이 흐른 아직까지도 매년 수십조 원에 달하는 연구비만 까먹고 있을 뿐 해결의 열쇠는커녕 열쇠 비슷한 것도 발견했다는 발표는 없다.

그러고 보면 인류 최초로 핵물질을 상용화시킨 맨해튼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오펜하이머와 핵심 브레인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류의 공적으로 급부상한 일본을 하루라도 빨리 저지해야 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목적으로 서둘러 핵폭탄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그 즉시 후회했다지 아마?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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