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곡진한 마음이 어딘가에 닿기를
그 곡진한 마음이 어딘가에 닿기를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7.23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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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사르나트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릭샤꾼

마크와 내가 막 사르나트에 도착했을 때, 원래 300루블에 값을 치르기로 약속했던 릭샤꾼은 오는 내내 길이 막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대며 돈을 조금 더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략적인 릭샤 값 시세를 이미 파악한 이후라 300루블도 충분히 많음 금액임을 알고 있었다. 세계여행을 시작하며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한국인 마크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정관사 하나 놓치지 않고 릭샤꾼에게 영어로 따졌다. 기사님, 우리와 일전에 약속한 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균적인 릭샤 교통비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마크의 기사님은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인도의 관광업, 교통업 종사자들이 으레 그렇듯 분명 마크의 영어를 충분히 알아듣기는 했을 것이다. 알아듣고 못 듣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릭샤꾼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의 눈동자는 허공의 한 지점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릭샤 아저씨도, 마크도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마주 선 둘 사이에서 정돈된 영어와 완고한 눈빛이 부딪혔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아저씨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그의 릭샤에 달려 있는 힌두교 시바신의 모형을 가리키며, “인디아 이즈 그레이트 컨트리, 시바 이즈 그레이트 갓”하며 헤실 거렸고 아저씨는 동그란 눈으로 해맑게 웃음을 되돌려주더니 순순히 제값을 받고 사라졌다. 내가 만난 인도의 사기 혹은 흥정꾼들은 운 좋게도 다소 사소했고, 좋게 말하면 때로는 순수했다. 뻣뻣한 마크 옆에 있으니 내가 왠지 넉살 좋은 역할을 맡게 된 것 같았는데 무언가를 해낸 기분이 들어 흡족했다. 우리 앞에 사르나트의 스투파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이 있는 오후였다.

 

사르나트

사르나트는 부처가 처음 설법을 전파한 곳으로, 불교의 4대 성지 중의 하나다. 불교 4대 성지는 대개 인도의 북동쪽에 몰려 있는데, 이 지역이 부처가 당시 활동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각 성지들은 부처의 삶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부처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불법을 깨달았다는 장소인 보다가야, 그 불법을 제자들에게 처음 설파하기 시작했다는 이곳 사르나트, 여러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열반에 들었다는 곳인 쿠시나가르. 태어난 곳인 룸비니를 제외하면 남은 세 곳은 모두 인도 북동에 있다. 기원전 몇 백 년에는 지금과 같은 국가도, 국경도 없었을 테니 지금의 인도의 북동쪽과 네팔의 남부를 아우르는 지역이 곧 부처의 활동지다.

흥미롭게도 사르나트는 인도 최대의 힌두교 성지 바라나시 근처에 있다. 릭샤로 3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니, 용산과 신촌 정도 거리라고 할까. 부처가 살았던 시대에도 갠지스 강에서는 시신을 화장했다. 영원한 지속을 바라며 강으로 흩뿌려지는 시신을 바라보던 부처는 그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 사르나트의 나무 밑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설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와 그로부터 벗어나는 근원적인 방법들을. 죽은 이후 신성한 강에서 불태워지면 다 해결될 거라는 믿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생의 고통들을. 설법을 들은 제자들이 하나 둘 모였고, 모인 사람들이 불어나 불교는 점점 더 퍼져나갔다. 인도 전역으로, 스리랑카로, 동남아시아로, 티베트로, 중국으로, 한국과 일본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한국에서 등산하다 종종 마주치는 절들은, 사르나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힌두교와 불교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던 문제: 부처는 이를테면 인도 사람인데, 왜 인도는 지금 힌두교가 주류인가? 심지어 인도 내에 불교 신자는 거의 남아 있지도 않다. 이 부분은 보다 자세하게 따져 보아야할 문제일 텐데, 왠지 나는 인도에서 그 특이한 부분이 알아서 납득이 됐다. 우선 너무나 낯선 종교인 힌두교와, 내가 흔히 알던 불교가 꽤 닮았다는 것.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 앞에 사천왕 그림이나, 부처의 뱅글뱅글한 머리 스타일, 여러 부처들의 얼굴들, 사원 양식과 그림들은, 힌두교에서 보았던 것들과 겹쳤다. 민간 신앙적인 측면에서 힌두교와 불교는 의외로 공유하는 게 많은 것처럼 보였고, 교리의 연결고리를 떠나 둘의 겉모습은 확실히 같은 문화적 토양 안에서 자라난 듯 했다. 인도의 힌두교는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대표적인 다신교인데, 어떤 사람들은 부처나 예수도 신으로 모신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러니까 힌두교의 입장에서, 부처의 불교는 하나의 새로운 종파 정도거나, 집 나가서 대성한 사촌 같은 느낌인 것이다.

나는 두 종교의 교리를 자세하게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 교리의 느낌 정도는 인상비평 식으로 알고 있다. ‘영원한 건 절대 있어’와 ‘영원한 건 절대 없어’ 힌두교에서는, 인간에게는 ‘영원한 본질’이 있고 결국 우리는 그 영원한 본질로 돌아간다. 요가의 자세 하나하나에는 원래 모두 하나의 신이 배당되어 있다. 심신에 좋은 요가의 자세는 본래 신이라는 영원한 본질과 잠시나마 하나가 되는 방편이었다. 불교는 그 영원한 본질을 부정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는 없다. 시신 불태워 강에 뿌린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니다. 다만 그 ‘본질 없음’ 만이 영원하다. 사람들이 자꾸 있다고 믿으니까 있게 된 것이다. 없는 걸 알면 사라진다. 생도, 고통도, 둘 다. 힌두교나 불교나 아무튼, 있는 게 영원하거나 없는 게 영원하다. 그 법도를 깨닫는 자들은 구원받는다. 삶에서 놓여난다. 삶에 가득 찬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힌두교나 불교나 결국 비슷한 걸 원한다.

 

거리와 공원

두 종교의 내부는 훨씬 복잡하므로 애초에 이런 투박한 요약을 허용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인도에서 두 종교의 차이를 무언가 몸으로 느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일상적인 인도의 거리, 모든 것들이 마치 영원히 이렇게 굴러온 것처럼, 강물이 언제나 흘러온 것처럼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말한다. 차들은 클락션을 누른 상태를 유지한 채 나아간다. 마치 자신의 소리도 여기에 다 있다는 듯. 인도에는 인도 사람만큼의 신이 있다는 농담처럼,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의 목소리가 인도 거리에 분분한 것 같았다. 이 소란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인도를 좋게 경험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다른 여행자들을 보며 느꼈다. 좋게 말해서 다신교와 같은 다양한 소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것이지, 때로는 그저 시끄러운 난장판이다. 아무튼 그 난장 속에 사람들이 작은 사원의 종을 울리고 이마에 점을 찍고 가는 힌두의 거리.

인도, 특히 북인도에 종종 남아 있는 불교 사원들은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사람들은 조용조용 걸어 다녔고, 풀밭이 많았다. 사실 종교적 특성보다는, 불교 유적들이 일종의 공원처럼 이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란스러운 거리와 다르게 불교 유적들의 내부는 넓고 쾌청한 잔디밭이었다. 불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인도 현지인들도 이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소란에 지친 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텅 빈 잔디 풀밭. 무언가 욕망하는 악다구니가 없는 평안함. 바깥은 사람으로, 먼지로, 릭샤로 난분분한데 이곳은 놀라우리만큼 평화로웠고, 연인들이 도시락을 먹으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좋은 풍경이네, 좋은 풍경이야. 인도의 소란에 적응하지 못한 마크도 이곳에서는 한결 좋아보였다.

사르나트는 불교의 성지인 만큼, 각국의 불교 신자들이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중앙부에는 거대하고 둥근 원통형 불탑인, 황토색 스투파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본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단체 신자들이 그 주위를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렇게 빙글빙글 돌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구나. 부처가 있던 당시 여러 건물들이 있었다던 부지에는 대부분의 폐허가 있었지만 불교의 땅임을 알리듯 많은 보리수 나무가 이곳을 감싸고 있었으며, 각국의 사람들이 각국의 언어로 부서진 건물 위에서 절하고 다시 절했다. 기도하는 사람이나 절하는 사람이나 종내에는 다 같은 마음이겠지. 그 곡진한 마음이 어딘가에 닿기를, 결국 닿았다고 언젠가 믿어지기를. 사르나트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후 마크는 부처가 깨달은 보다가야로 향했고, 나는 어쩌다 부처가 태어난 룸비니로 향했다. 둘 다 사실 별 이유는 없었는데, 어쩌면 어떤 마음이 어딘가에 닿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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