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눈 내리는 날의 마당
눈 내리는 날의 마당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때, 이글거리는 화목난로 옆에 앉아서 유리창 너머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노라면 별별 것들이 다 지나간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것들은 곧 생각으로 이어지고,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동물이구나, 하고 놀란다.

겨울 한철 내내 잠을 자는 곰이나 뱀들의 생존전략은 너무나 훌륭하다. 겨울에도 먹을 것을 찾아 열심히 뛰어야만 하는 멧돼지나 고라니나 이런저런 온갖 새들이 겪는 가난의 슬픔을 곰이나 뱀들은 아마 상상도 해볼 수 없으리라. 아, 이것은 연구해볼 만한 불합리요 불공정이다.

예전의 나는 이런 신통한 주제를 놓고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만 야생 동물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웠을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들은 내게 그저 하나의 풍경이요 정물이었다. 잘 그린 그림 앞에 섰을 때의 마음 같은 뭐 그런 것.

족제비 암수 두 마리가 감나무를 날렵하게 오르내리며 너냐 나냐,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해서 보고 나면 또 보고 싶어지고, 그리고 좀 더 오랜 시간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녀석들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면 총알처럼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삼사 초 이상은 볼 수가 없다.

꿩이 마당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나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대포라도 쏜 것 같은 소리를 터뜨리며 달아날 때 나는 간이라도 떨어진 듯이 놀란다. 놀라는 순간의 충격이 흡사 청룡열차라도 타고 난 뒤의 그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게 좋아서, 달아나는 꿩의 뒷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보고 싶어서 매번 다시 나타나 주기를 소망해 보지만, 꿩들은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내 소망 따위에 관심을 가져주지는 않았다.

신기해서 즐겁고, 놀라서 또한 즐거운 것이 시골 살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커다란 동물 고라니가 마당으로 들어와서 나를 넘어뜨릴 수도 있다는 상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녀석은 아마 산에 흙이 모두 눈에 묻히고 얼어붙어서, 필요한 염분을 취할 수가 없어서 헤매다가 내 집 마당으로까지 들어왔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어둠 속에서 이리 갈팡, 저리 갈팡, 느닷없이 날뛰는 고라니에 놀라서 고꾸라졌고, 갈비와 대퇴부가 으스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상해를 입고 말았다.

그날도 나는 아마 04시를 전후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때가 그 시간이었다. 03시에서 08시 사이, 그 즈음이면 내 머릿속이 잘 닦은 유리처럼 투명해져서 온갖 신기한 생각이 막 일어난다는 걸 내가 알아차린 게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부터인지 나는 그 시간에 깨어 있기를 소망했고, 밤이 9시로 넘어갈 즈음이면 벌써 한밤중이라 여겨서 전화를 비롯한 모든 소통 장치들과 담을 쌓고 잠이 깊이, 아주 깊이 들어버리기를 기원하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곤 해 왔다.

그런데 사람의 욕망이란 역시 한계를 모르는 것인가 보다. 나는 차츰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마당을 느끼고 싶었다. 날이 밝아오는 장면을 방안에 앉아서 보고 싶기도 하고, 뱁새들의 지지배배 하는 소리를 듣고도 싶었다. 우리 집은 팔작지붕 형태의 전통가옥이라 처마가 낮고, 특히 겨울에는 방안에 앉아서 마당을 바라볼 수는 없게 돼 있었다. 이게 불만이었던 나는 결국 방 한 칸을 새로 짓기로 했다. 대외적인 명목은 책방이었다.

일곱 평 남짓한 넓이에 복층 구조의 유리창이 제법 커다란 책방 하나를 내 손으로 짓기 시작해서 내 손으로 끝내기까지 삼 년이 넘게 걸렸다. 지어놓고 보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싶었다. 겨울 한철 열심히 지피는 장작난로가 아니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과장된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책방 앞의 동백 두 그루
책방 앞의 동백 두 그루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래, 그것이 있었다. 장작난로, 이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판타지, 꿈의 세계였다. 이 꿈의 세계는 따로 난방장치가 돼 있지 않았다. 밖에서 문을 열면 바깥보다 몇 배는 강한 냉기가 온 몸으로 마치 강도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불을 지피고 십여 분쯤 지나면 얼음장 같은 실내 공기가 슬슬 녹아들어 간다. 그때의 느낌은 달콤한 크림 속으로 내 몸이 통째로 잠겨드는 것만 같아서 눈이 절로 감겨진다. 그러니까 이 책방은 살짝 과장을 하자면 겨울궁전인 셈이었다.

잠자는 방에서 이 겨울궁전까지의 사이에 동백나무 두 그루가 있고, 거리는 대략 십여 미터, 낮에 보면 거리랄 것조차도 없이 그냥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어둠 속에서 보자면 제법 멀다. 달이 없는 새벽에는 살얼음판이라도 걷듯이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더듬더듬, 더듬어야만 한다. 그날도 하늘에 달은 없었지만 눈이 쌓여 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기 어디에 고라니 녀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라니 녀석은 아마도 동백나무 밑에서 흙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어떤 위험의 예감도 없는 와중에 홀연 인간이 출몰했으니 얼마나 기절초풍을 했을 것인가. 저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둘 다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잠자던 개도 일어나서 컹컹 짖어대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중 삼중으로 놀란 고라니는 이제 완전히 눈이 멀어 버렸다.

하늘이 내려앉을 때의 놀람이 그 정도나 되려나. 땅이 푹 꺼지는 순간의 놀람이 그만이나 하려나.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나서 순식간에 끝난 일이었지만, 어리둥절함의 시간은 길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방으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내리자니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딱히 어디랄 데도 없이 마구 쑤시고 결리고 아프고 난리가 아니었다. 소염제 한 통을 온 몸에 떡칠이라도 하듯이 뿌려대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녀석들의 가난이 극에 달했구나.

 

책방의 장작난로
책방의 장작난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날에야 나는 비로소 확연하게 알았다. 예전에도 물론 그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헤맨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가난과 연계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가난은 사람의 고통이요 슬픔이라는 청맹과니 같은 관념에 빠져 있었다고나 할까. 시인 백석의 자전적인 시 한 수가 생각났다. 제목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중략
니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하 생략

 

출출이는 북한 지역 토속어로 뱁새를 뜻한단다. 마가리는 움막이고, 그러니까 백석은 지금 뱁새들이나 지즐지즐 울어대는 깊은 산속으로 사랑하는 여인 나타샤와 함께 도망쳐 들어가서 산속에 움막을 짓고 살고프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식인 그룹에서 문학예술 특히 시인들만큼 가난이 한몸처럼 붙어 있는 사람을 찾기도 아마 어려울 것이다. 대중적으로도 너무나 유명해서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 같은 편견을 갖게 하는 시인 박목월에게도 가난은 딱 붙어 있었다.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은 관사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로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           
박목월의 ‘某日’ 중 일부

 

돈을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빗속의 거리로 우산도 없이 도망쳐 나온 시인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은 이런 시에 비하자면 농촌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신석정의 가난에 대한 슬픔은 역시 자연철학에 가깝다.
 

살아보니
지구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시인 신석정의 작품 ‘발음(發音)’일부

 

 

편백나무 장작
편백나무 장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아내는 못 먹어서 빼빼 마르다 못해 고왔던 얼굴에 버짐이 마구 피어오르고, 딸들은 공책이 없어서 모래 위에 글자를 쓰고 있을 때, 시인은 움찔, 움찔, 밀려 나오는 눈물을 꾹꾹 밀어 넣으며 우주와 지구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러면 문명비판으로 일가를 이룬 시인 김지하의 가난에 대한 관점은 어떨까.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김지하 ‘서울길’ 부분  

 

김지하는 역시 그렇다. 폭탄 같다. 다발총 같다. 이놈의 가난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 가난이 온 곳을 찾아서 확 불살라버리자.

이렇게 저렇게, 가난의 몇 가지 형태를 뒤적거리고 있노라니 불현 듯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새벽에 나를 넘어뜨린 고라니는 배가 고팠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배고픔 못지않게 소금 고픔의 문제가 컸던 것이라는 발견, 그래서 그렇게도 과감하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인간의 거주지로 들어와서 헤매었던 것이다.

사태의 전말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배추김치 한 포기를 꺼내서 고춧가루를 씻어내고 동백나무 밑에 얌전히 모셔두기로 했다. 고라니는 다시 나타나서 배추김치 속에 들어 있는 소금을 먹을까? 이쪽으로는 발걸음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미 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이제 그것이 궁금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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