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연못에 빠진 창포
연못에 빠진 창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가만히 앉아서 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만물의 이치가 다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 느낌은 조용히 하늘을 볼 때와도 다르고, 바다에서 망연히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을 때의 느낌과도 사뭇 다르다. 하늘이나 바다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을 희구하는 이를테면 여행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반면 꽃은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을,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왜 왔는가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지금은 창포가 피는 계절이다. 내가 어렸을 때 창포는 엄마들이 머리감을 때 쓴다고 제법 애지중지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직접 참여한 적은 없었고, 그래서인지 뭐 그리 깊은 추억 같은 것을 환기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마당 한쪽의 작은 연못가에 굳이 창포를 빙 둘러 심은 까닭은 아마도 그 해의 그 여름 그 황홀한 사건의 후유증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해의 그 여름, 살벌한 전두환 시대가 끝나고 ‘착한 사람’임을 주장하는 노태우 시대가 열렸을 즈음이었다. 서울 하고도 봉천동 산꼭대기 동네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달리면 나오는 허허벌판, 거기 어디 버스 종점에서 노란 창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천을 따라 한참을 가면 이른바 ‘주택 이백만 호 공급’ 프로젝트에 따라 진행 중인 아파트 신축 공사장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펼쳐져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공사장을 나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하리라.

내가 한때 돈을 왕창 벌었다기보다 긁어모은 적이 있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대통령 노태우 덕분에 그런 경험을 했었다고 하면 더더욱 믿지 않는다.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의 물음표를 해소해주기로 하자면 최소한 두 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다 설명해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태우가 내 생애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한 마디 덧붙여주면, 그러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거려준다.

나는 노태우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악수도 해보지 않았다. 그에게서 직접 무엇을 배운 것도 당연히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노태우가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거침없이 말하곤 한다. 말할 뿐만 아니라 생각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고, 조금 더 고상한 표현을 쓰기로 하자면 변증법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기랄까 계기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마에서 얼굴을 거쳐 목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는 남학생을 뒤에서 동료 남학생이 안간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동료 남학생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남학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이었고, 피를 흘리며 끌어안긴 남학생은 머리가 푹 꺾여 있어서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살이 덜덜 떨리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이상한 전율과 감동이 나를 휘어잡았다. 전두환 시절 내내 최루가스를 뒤집어쓴 채로 죽음의 이야기를 듣고 살았지만 그렇게도 압도적으로 강렬한 충격은 처음이었다. 사진에 등장한 학생들의 이름과 사건 경위는 나중에 알았다.

최루탄은 사람을 향해 정면으로 직접 발사해서는 안 된다. 법은 그렇게 돼 있었지만, 당시의 경찰은 호시탐탐 직격탄으로 사람을 다치게 했고, 불구자를 만들어 냈으며, 죽어가게 했다. 그날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그렇게 죽어갔고, 총학생회장 신분의 우상호가 죽어가는 동료 학생을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렸다.

 

창포 꽃봉오리
창포 꽃봉오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슬픔과 분노와 두려움과 설렘과 떨림 등등 오만 가지 감정으로 범벅이 된 영결식을 끝낸 뒤의 어느 날 나는 사진학원을 찾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었다. 천 마디의 말보다도, 백만 개의 문장보다도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사실을, 진실을 담아내는 장르는 아무래도 사진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사진을 찍고 싶었다. 가공되지 않은, 조작되지 않은, 뽀샵 따위로 분칠하지 않은 진짜 사진을 강렬하게 경험한 내 영혼이 나를 그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 즈음의 나는 사실 카메라 한 대도 없었다. 카메라 한 대도 없는 주제에 사진학원을 다닌다는 게 좀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까짓 안 될 게 뭐냐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차츰, 조금씩 알아갔다.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로 하자면 열정 못지않게 돈도 제법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능 좋은 카메라와 확대기 등 암실 장비 일체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충 계산해 보니 2년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자금의 출처는 건설현장 날품팔이였다. 건설현장 날품팔이 노릇이야 뭐 오래 전부터 가끔 해 온 일이었지만, 이제는 가끔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적극적으로, 집약적으로 그 일에 매진해야 할 필요가 생긴 셈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설현장은 사람이 다섯 명 정도는 죽어야 공사가 다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험이 일상화돼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낼 장비라 할 만한 장비도 없었고, 작업을 위험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기계라 할 만한 기계도 없었다. 일례로 5층 정도의 건물은 자재를 운반하는 승강기조차 설치를 안 해서 모래든 시멘트든 무엇이든 사람이 직접 등에 지고 5층까지 오르내려야만 했다. 때문에 열흘 이상을 계속 출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열흘이 아니라 이십일을, 삼십일을, 무려 육십오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작업을 했고, 야간작업이 필요할 때는 그것조차도 마다지 않고 참여했다. 그런 나를 나도 모르게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어느 하루 현장에서 보통 ‘오야지’라고 부르는 하도급업자 사장이 나를 불렀다. 며칠 뒤부터 공사 하나를 새로 시작하게 되는데 거기 가서 반장을 하라는 거였다.

공사현장의 반장이란 작업자들의 출퇴근 체크부터 개인의 적성에 따른 작업위치 지정, 인건비 관리, 원청업체나 감리업체 직원들에게 술 사주기, 화투판을 벌여서 돈 잃어주기 등등 오만 가지 잡다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꽤나 피곤한 자리였다.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오기 시작할 즈음 또 하나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나 할까. 어느 하루 현장소장이 나를 부르더니 일 하나를 맡아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대통령 후보 노태우의 대표적인 공약 ‘주택 이백만호 건설’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여기저기 도처에서 한꺼번에 공사가 벌어지고 보니 업자를 찾기가 어려웠고, 인력 또한 태부족인 상황이었다. 대구와 경북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소규모 건설 회사들이 대거 수도권으로 진입하던 시기였고, 일단 수도권에 자리를 잡았다 하면 금방 재벌급으로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시들어갈 즈음의 창포
시들어갈 즈음의 창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공사 현장의 분위기는 뭐랄까, 마치 전쟁터에서 공병대가 교량을 설치하는 것과도 같았다. 군복 차림의 영관급 장교들이 무시로 현장을 드나들며 공사기일 단축을 지시 또는 요구하고 있었고,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 즉시 트럭으로 방위병들을 실어다가 풀어놓았다. 박정희 시절 남산에 중앙정보부를 지을 때 군인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충분히 경험한 바 있는 나로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발설하면 안 되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다. 군인들이 앞뒤에서 호령을 하면 업자들은 자동으로 돈을 벌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군인들이 호의적으로 업자들 편에서 그런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군대 내에 있어야 할 군인들이 민간 영역으로 넘어와 있으니 뭘 모르는 게 당연하고, 모르면서도 아는 체를 해야 하니 업자들은 자동으로 돈을 벌게 되는 구조가 형성되는 거였다.

건설업은 무조건 돈을 번다는 신화 아닌 신화가 생긴 것도 아마 그 시기였을 것이다. 얼어붙은 콘크리트 바닥에 방수를 하고 미장을 하고 타일을 붙이고 공사 끝, 선언을 하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니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니 목욕탕 안에서 수영하기가 되는 거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서 얼음이 풀리면 여기저기 도처에서 문제가 드러나지만, 업자가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자보수에 관한 규정이 엄격하지도 않았고, 이른바 ‘내 집 마련’ 열풍에 휩쓸려 입주한 집 주인들 또한 그런 것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스스로 전문 업체를 찾아다녔다.

그 어디에서도 큰 그림은 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냉철하게 무엇을 생각해볼 만한 시간을 낼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비전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고, 그냥 속절없이 돈이라는 이름의 광풍에 휩쓸린 시절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랬다.

처음 세 명으로 시작한 나의 이른바 공사하청 사업은 금방 십여 명 규모로 덩치가 커졌고, 또 다시 금방 스무 명, 서른 명, 계속 늘어나서 마흔일곱 명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좌우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창포와 샤스타데이지
창포와 샤스타데이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이상했다.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가 싶었다. 내가 한 일을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재미가 없었다. 돈이라는 것을 이토록 허무하게 벌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한가득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도 아마 조금은 작동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애초의 꿈이었던,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해야만 했던 카메라와 암실장비에 관한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그날의 결심도 당연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돈 버는 재미, 라기보다 몰아치는 광풍에 영혼이 털려버린 까닭으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망각해버린 형국이었다.

돈 벌이에 미친 사람은 다른 생각을 안 해야 한다. 반성이건 죄의식이건 인간적인 감정은 아무것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떼돈을 벌 수 있고, 남의 돈도 내 돈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렇게 계속 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맹목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편안한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시기의 그 엄청난 돈벌이는 나에게 독약임과 동시에 보약이었던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사람이 크게 다쳤고, 죽었고, 배신과 사기와 협잡이 내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몸을 내 스스로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그 결심이 성공했다면 지금의 나는 당연히 없겠지만, 실패한 까닭에 다른 것을 알았다. 시를 알았고, 소설을 알았으며, 역사를 알았고, 무당의 속성과 그 본질을 조금은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람을 알았다. 그리고 또한 꽃과 나비와 고라니와 두견이를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 한 채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지을 수 있고, 내일 당장 주머니에 돈 한푼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나의 이 모든 역량과 안목은, 노태우가 없었다면 결코 축적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는 것이니, 노태우는 내 인생 최고의 스승임이 분명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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