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수상 고추 전시모드
수상 고추 전시모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서울을 가야 하나? 뭐 굳이 서울까지 달려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고민이 많은 날들이었다. 고민을 하면서도 온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열망은 또 컸다. 명색이 당원인데 당의 최대 축제인 당대표 선출대회, 그 대단원의 현장을 놓치면 죄의식을 크게 느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돈이 없으면 하루를 살아내기도 어려운 서울, 그래서 떠나기로 했던 서울, 그 서울 속으로 나를 다시 들이미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게 나의 마지막 자존, 내지는 개똥철학인 걸 어쩌랴.

서울행을 그만두기로 최종 결심한 그날 밤 은하수가 마치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와서 내 몸을 통째로 덮어버리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났다. 단말마의 비명도, 몸부림도, 그 어떤 저항도 못해본 채로 나는 순식간에 은하수 더미에 묻혔던 것 같았다. 무슨 이런 감쪽같은 꿈이 다 있담, 투덜거리며 시게를 보니 03시였다. 일어나서 움직이기에 딱 좋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짓도 못하고 그냥 눈이나 깜빡거리며 앉아 있었다.

벽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앉아 고대 도시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생각했다.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화산재 속으로 달아날 엄두조차 못 내본 채로 그냥 묻혀버렸던 사람들과 온갖 동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그대로 미라가 되었고, 수천 년 뒤에 그들은 엄마가 아이를 옴싹 품에 끌어안은 모습으로, 혹은 남녀가 서로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울부짖는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그런 그림들을 상상하며 눈이나 깜빡, 깜빡 하고 있기를 얼마나 했는지, 문득 귀뚜라미가 노래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뚜라미 소리 감상에 넋을 잃었던가.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여치 소리가 들렸다. 넋을 잃은 와중에도 귀뚜라미와 여치 소리를 분별해서 듣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신기함은 곧 감격으로 전이되어 갔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나를 포근하게 안아준다는 느낌이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도 아니련만, 미칠 것 같다는 사람을 자주 접하는 요즘이었다. 웃자고 하는 농담 같지도 않았다. 그 표정과, 그 얼굴을 보노라면, 그는 내일이나 모레쯤 정말로 미쳐서 히죽히죽 웃고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사람도 실제로 미쳐서 헤매 다닌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거리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경쟁이라도 하듯이 질러대는 귀뚜라미와 여치 소리 사이로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받기로 했다. 친구 색시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살짝 반갑기는 했다. 지난 4월에 고사리 꺾는다고 넷이서 함께 산을 오른 이후 처음이었다. 그 반가운 목소리가 물었다.

“오늘밤 축제에 누가 나오는지 알아요?”

“축제? 뭔 축제?”

뜬금없다는 투의 반문을 하는 순간 아 고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바람에 말린 고추라 해서 해풍고추로 널리 알려진 우리 동네 고추. 그 고추를 소재로 매년 축제라는 이름의 행사를 치렀는데 코로나19의 기습으로 중단됐었다. 중단된 축제를 2년 만에 재개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기는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까지는 몰랐다.

“그날이 오늘이었어요?”

“이제야 그걸 알았다면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아니에요. 내가 알아보고 전화할게요.”

어쩐지 그랬다. 그것이라도 내가 알아봐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해마다 고추축제 첫 날이면 달려오곤 했었다. 고추축제 자체가 그녀의 관심은 아니었다. 본행사보다 인기가 높은 부대행사에 나오는 가수가 그녀의 관심이었다. 가수 중에서도 남자 가수를, 남자 가수 중에서도 특히 남진을 그녀는 좋아해서 남진이 출연한다는 날에는 두 시간도 전부터 달려오곤 했다.

그런데 올해도 남진이 출연할까? 알아보고 전화를 해준다고 했지만 직통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맥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축제관련 프로그램을 확인해보는 정도였다. 확인해보니 남진은 없다. 초대가수 중에 내가 아는 이름은 정수라 한 명뿐이다. 올해는 남진이 아니고 정수라가 나오나 보네요, 했더니 그녀는 그래요, 하고 시무룩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 가수 정수라를 기억하지? 유행가를 좋아하지 못해서 노래방 같은 데도 이날평생 두 번인가 세 번밖에 가보지 못한 나였다. 그것도 동생과 동생의 색시가 이구동성으로 가요, 가요, 해서 마지못해 가본 것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남진도 아니고 이미자도 아닌 정수라를 기억한다. 신기하다.

 

1등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노래 가사도 드문드문 한 토막씩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에 조각구름 떠 있다고 했던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넘친다는 소절도 기억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룰 수 있는 자유, 자유, 자유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노래는 그랬다. 별나게도 자유와 행복을 강조하는 노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를 화나게 했던 단어들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그 노래 가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할 수가 없다. 그 노래가 천지사방으로 울려 퍼진 것은 사할린 인근에서 대한항공 여객기 한 대가 250여 명의 탑승객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직후였고, 탱크와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학 정문 등 중요 시설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며, 안기부 요원과 경찰 정보라인 그리고 보안사 군인들이 사복 차림으로 하늘 아래 두려울 게 뭐냐는 듯이 아무나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고문을 해대던 시절이었다.

자유라는 거, 행복이라는 거, 딱히 배우고자 하지 않아도 그 개념이 온 몸으로 들어와서 척척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것,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슬프게도 그것은 일부에게만 가능했다. 권력을 탈취해서 흔드는 자들, 그들에게 자유는 분명 행복이었다. 권력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는 명백하게도 고통이었다. 착취의 자유가 무당처럼 춤을 추고. 사기의 자유와 탄압의 자유, 납치의 자유, 도둑질의 자유, 그런 맹랑한 자유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정수라의 그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다. 노래를 가장한 선전이요 선동이었다. 불행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조건 행복하다고 생각하라 하는 압박이요 강요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수라 가수의 창작이 아니라 권력을 탈취한 자들이 고안해낸 것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물론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에 의지해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 스토리가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알았다. 저것들이 국민을 무서워하는구나. 맞아죽을까, 쫓겨날까 두려워하는구나. 그래서 거짓 선동으로 나름 안간힘을 다하는구나.

지역에서 치러지는 온갖 명목의 축제도 면밀히 따지고 보면 민심을 얻기 위한 선출직 공직자들의 안간힘이었다. 그 바람에 동네 축제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동네 고추 축제만 해도 애초에는 지극히 소박한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었다. 그것을 군의원과 군수가 군 차원의 축제로 가져가면서 내용이 완전 변질돼 버렸다. 행사를 대규모로 치르다 보니 재정문제가 발생하고, 재정을 충당하려다 보니 각종 상인들을 유치해서 높은 가격으로 자리 배정을 해야 하고, 상인들은 비싼 값으로 자리를 차지했으니 저마다 갖고 있는 상술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평균 가격 15,000원인 파전 한 장을 축제 현장에서는 20,000원을 넘어 30,000원까지도 서슴없이 받아내는 식이다.

어쨌든 뭐 그렇다. 오늘날의 축제는 순수한 축제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팽창할 대로 팽창해서 더 이상은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돼버린 자본주의가 비틀거리는 현장이라고나 할까. 생각을 이렇게 하고 나니 문득 가서 보고 싶어진다. 지금까지는 친구나 옆에 사람의 강권에 따라 마지못해 갔다가 소외감이나 느끼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가는 것이니 소외감 같은 건 아마도 없으리라.

 

1등 상세
1등 고추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시간이 오후로 접어들면서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꽹과리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가 마치 나더러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5시쯤 집을 나섰다. 도로 양쪽으로 자동차가 빽빽하게 서 있고, 파전 부치는 냄새인지 장어 굽는 냄새인지 알 수 없는 느끼한 냄새가 콧속으로 오랑캐처럼 쳐들어오고, 질서유지를 맡고 나선 자원봉사자들의 호각 소리가 마치 무슨 신호라도 주고받듯이 여기서 울리면 저기서 울리기를 되풀이한다.

고추 품평회는 이미 끝나서 전시 모드로 들어가 있었다. 무대 앞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고, 무대 위에서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 류의 장터에서는 바비큐에 통닭에 장어에 기타 등등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은 죄다 꺼내서 지지고 볶고 삶고 굽는다.

“자네 쥴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대 앞을 빠져나와서 장터를 기웃거리는 참인데 느닷없이 어깨를 탁 치며 질러대는 소리가 있어, 홱 돌아보니 활터에서 알았던 사람이다. 반갑다고 악수를 하고,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딱히 궁금할 이유도 없는 안부를 묻고, 그이가 끄는 대로 자리에 앉아 소주 한 잔을 받아들고 나니 아까의 질문을 다시 한다.

“쥴리요?”

“아 쥴리 몰라 쥴리?”

“쥴리가 뭐, 본인이 쥴리 한 적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아따 이 사람이 이거 깜깜하구만 잉?”

나를 나무라는 그이의 웃음소리가 호쾌해서 나도 크게 웃었다. 그러자 옆 자리의 낯선 사람들도 우리를 따라서 킬킬거렸다. 함께 웃고 나니 뭔가가 통했달까 뭐랄까 하여튼 이심전심이 있어 합석을 하기로 했다. 낯선 사람들과 합석을 하고 나니 분위기는 자연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한 마디 너도 한 마디, 서로가 질세라 한두 마디씩 꺼내고 보태고 보완하고 추가하고 법석을 떠는데 주제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까닭으로 소재의 빈곤 같은 것을 느낄 틈은 없었다.

 

2등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메인 주제는 ‘쥴리’였지만, 압권은 이천백오십만 원짜리 변기였다. 이천만 원도 넘는 변기에 걸터앉아 힘을 주면 무엇이 나올까, 아무 것도 안 나올까? 다른 희한한 것이, 이를테면 금으로 된 똥이 나올까? 등등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아마 한 시간은 족히 소비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얘기는 모조리 나왔다. 프랑스 르몽지에서 보도했다는 콜걸 단어까지도 거침없이 소환되었고, 그보다 훨씬 더 심한, 모욕적이고 수치스럽고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도 부정하고 싶어지게 하는 단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논평이 아니고, 비판은커녕 비난차도 못 되는, 조롱이며 야유였다. 사람이 사람을 조롱하고 야유한다는 것은, 같은 등급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회탈을 생각했다. 돼먹지 못한 왕과 왕족 그리고 양반 나부랭이들을 야유하고 조롱하는 하회탈, 그 탈을 쓰고 추는 춤.

그래야지. 그렇게라도 살아서 나름 씩씩하게, 당당하게, 의연하게 미래를 준비해야지. 나는 너희들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깔끔하게 당당하다는 인식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게 또 무엇 있으랴.

오늘도 귀뚜라미와 여치는 귀뚜라미 소리를 내고 여치 소리를 낸다. 이 소리에 내재된 뜻이 따로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짝을 찾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부르는 노래인가. 귀뚜라미를 몹시 좋아했다던 중국의 마지막 황재 푸이가 생각난다.

다음날 오후 늦게, 절묘하고도 기묘한 숫자 하나가 내 가슴을 팡팡 뛰게 했다. 내가 당원으로 등록돼 있는 당의 대표로 선출된 이재명이 얻은 득표율 77,77퍼센트.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아마도 한동안 즐거운 설왕설래를 이어갈 것 같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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