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1회

영화소개 : ‘미몽’, 1936년 작, 감독: 양주남, 출연: 조택원, 문예봉, 유선옥 등

1. 새는 새장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

▲ '미몽' 포스터

‘미몽’이라는 영화는 애초에 꿈이라는 모티브를 끌고 다닌다. 제목에 뚜렷하게 제시한 것을 보면 꿈이라는 모티브는 꽤나 중요한 것일 테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나오는 새장 속의 새. 그렇다. 이 영화는 새장과 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꿈이라는 모티브는 그 새가 꾸는 것이지 온 인간이 꾸는 달콤한 꿈은 결코 아니다. 새장 속에 있기에 새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고, 철창 바깥을 꿈꿀 수도 있다. 우리는 여성을 먼저 떠올리기 전에 여성이 새가 되어버린 모습을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새라는 이름으로 불렀기에 새는 더 이상 날아갈 수 없다. 새는 새장 속에서 잠든다. 노래한다. 꿈을 꾸며 다시 지저귄다. 새라는 이름이 붙었기에 그것이 말하는 소리는 온통 지저귀는 것으로 들리고 철창에 달라붙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도 새라는 이름 아래에서 아름답게만 보인다. 조선의 여성이란 그런 것이다. 새장 속의 새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의 겨드랑이 아래에서는 따갑게 깃털이 올라오는데도 그것을 숨기거나 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버려두어야 한다. 철창 앞에서 깃털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가 새장 속에 있을 때 왜 달콤한 꿈을 꿀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새가 만약 새장을 벗어나 있다면, 그 누구도 새를 새라고 이름 짓지 않는 드넓은 세상을 활보할 줄 알았다면, 새는 결코 달콤한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달콤한 꿈이라는 것은 철창을 마주하고 철창을 갓 벗어났을 때에야 꿀 수 있는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밀려들어오는 자유의 숨결이 새의 숨소리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며 누군가를 애달프게 사랑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며 꿈을 만끽할 수가 있다. 달콤한 꿈이라는 것은 그토록 씁쓸한 한계를 동반한다. 꿈이라는 것이 애초에 깨어지라고 있는 것이라던가. 새는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새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새에게 달콤한 꿈이란 이루지 못할 현실의 벽이다. 그것을 어떻게 새는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광범위한 것들을 영화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새로 비유된 조선의 여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누가 그들을 새장 속에 가두고, 새라고 이름 지어 부름으로써 그들의 날개를 쓸모없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처음부터 타고 난 날개를 쓰게 내버려두질 않고 새장이라는 단단한 벽에 그들을 세워두었는지.

새는 그래서 무슨 꿈을 꾸는가. 그 달콤한 꿈이라는 게 대체 무언가. 무슨 대단한 꿈이라고 새들은 잠에 빠져 있는가. 자식과 남편, 가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애순이 찾아간 자유는 대체 무언가. 그것은 또 하나의 새장일 수도 있다. 하나의 새장으로부터 또 다른 새장으로 찾아간 새에게 자유란 없다. 호텔이라는 강압적이고 비밀이 많은 장소로부터 그녀는 또 갇힌 생활을 한다. 그러나 한 번 새장을 벗어나본 새는 그 방법을 아는 법이다. 그녀는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예전의 사랑에 얽매이지 않는다. 새장을 빠져나오려면 더 냉정해지고 차가워져야 한다. 누군가 연민의 정으로 호소하더라도 그것에 꿈쩍하는 법 없이 무뎌져야 한다. 역시 누군가 사회를 살아가는 법은 그렇다고 가르쳤고 그들은 배웠다. 새가 새장을 벗어나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새장이기 때문에, 새는 새장을 벗어나려 한다. 새를 새라고 부르지도 말아주길. 누구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연인으로 평생 불린다면 새는 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새장을 벗어난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목숨 걸고 더 달콤한 꿈속으로 뛰어드는 새는 새의 이름을 걸고 그 여정을 떠났을 것이다. 평양행 열차를 타려는 것도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멀리 떠나버리고 나면, 날개를 이용해 멀리멀리 달아나고 나면 그 무엇도 그녀, 곧 새를 붙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 하지만 우리는 잘 안다. 새가 꿈을 꾸고 있는 곳은 새장 속이라는 것을. 새는 새장 속에서 무슨 꿈을 그렇게 즐겁게 꾸고 있는가. 그녀의 딸, 정희가 자동차에 치이고 나서 그녀는 꿈에서 깨려고 한다. 꿈도 아니고 새장도 아닌 곳. 다시 새장으로 돌아가라 하면 절대로 새는 돌아가지 않는다. 새로운 바람, 새로운 세계와 햇볕, 새로운 기회와 자유로움이 넘실거리는 곳을 새는 응시한다. 결국 그녀는 죽음을 택하는가. 삶이라는 굴레에서 새장과 새장 바깥을 드나드는 인생이더라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이 다가오면 새장의 주인이 총부리를 겨누고 그녀를 철창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죽는다. 삶의 미련을 천천히 놓아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새장 속에 남아있는 어린 것을 걱정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정희는 새장 안의 또 다른 새. 얼마나 많은 세상의 암흑이 그 어린 것을 덮치려 할까. 정희의 어머니는 죽음 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려할 것이다. 이번에는 새장이 없는 곳에서 꾸는 꿈. 차라리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 고통스러울 것 없는 세계에서의 꿈. 어미의 완전한 일탈에 정희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게도 서로를 부르짖는 두 마리의 새. 아직 한 마리는 견고한 철창 앞에서 어미를 찾고 있던 것이다.

정희의 달콤한 꿈속에서, 어미가 타고 날아간 그 하얀 꿈결을 철창 너머 만지작거리면서.

 

2. 여자의 담배

수많은 모티브들이 있고 미장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담배다. ‘미몽’이라는 영화는 애초에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욕망에 관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 여러 모티브들이 꼭 나침반의 바늘처럼 주체로서의 여성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당시에, 물론 지금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상당한 부조리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욕망은 달콤한 꿈 정도로만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여성이 그 욕망을 이루고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깨어질 꿈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압도적인 다수고 그런 그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혀를 끌끌 찰 것이다. 결국에는 저렇게 될 것을,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애순에게 가장 잘 어울리면서도 가장 고고하고 아름다운 모티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담배다. 담배를 피우는 애순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고고한 사람이 된다. 고고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오랜 기간 동안 여자에게 고고함은 허락되지 않아 왔다. 오직 남성상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고고함의 오랜 정의였다. 그러나 애순의 담배를 보라. 애순이 입 바깥으로 내뿜는 연기를 보라. 그 모습이 얼마나 고고한가, 고고함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고고함이란 애순이 드러내는 세련미와 새로운 시대에 부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여성’이라는 표현은 이젠 너무나 낡은 표현이지만, 여성의 고고함이 시작되는 역사적 선은 그 표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애순은 담배를 피우는 여자, 한편으로는 ‘신여성’의 조건을 부합하면서 고고함이라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프레임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담배라는 모티브는 조선 여성에게 무조건 좋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아래의 인용구를 살펴보자.

“여성 자체가 화면에 재현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허구화된 이미지 재현이라는 당연한 조건에서.” - ‘한국영화에서의 여성상’ 중에서-유지나

애순이 내뿜는 담배 연기는 저 인용구 중 어느 것에 해당될까. 슬쩍 냄새를 풍겼다가 곧 사라지는 흰색 연기, 그것은 허구를 상징할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새롭고 도전적인 이미지가 화면에 재현되는 게 가능해졌지만 담배 연기처럼 금방 흐트러지고 만다. 애순의 고고함이 영화 내내 유지되지는 않듯이, 또는 그 고고함을 위해서 애순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듯이, 모든 것은 허구화된 이미지에 불과했고 여성들은 그런 애순의 고고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것도 투영되지 않는다는 점에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새는 새라고 불려서 새장 속에 갇히고 만다는 거대한 굴레로 영화는 다시 돌아온다. 그것은 애순이 가정으로 돌아와서가 아니다. 애순의 고고함은 가정과 정희의 요구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애순이 담배를 태우며 향유했던 모든 것, 끝없는 사랑과 사랑의 전이 혹은 배신, 그 속에서의 애순이 누릴 수 있었던 선택의 폭넓은 자유를 궁극에는 새장 속에서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이 애순에게 독을 권했을 것이다. 애순이 죽음을 선택하여 영화에서 사라져가는 순간, 우리는 직면한다. 조선 여성에 이어 아직도 한국 여성은 허구화된 이미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애순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역시 여전히 잔악하다는 것일 테다. 여성의 허구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오직 있는 그대로 우리는 여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 그것이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여성의 허구적 이미지를 조금씩 깨뜨리는 계기를 얻는다. 여성을 화면에 옮겨 놓는데 성공했다면, 다음의 목표는 당연한 것이다.

담배 연기가 후 불면 흐트러지듯이, 여성에게 덧씌워진 허구적 이미지 역시 후 불면 금방 꺼뜨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느 순간에도 애순이 누군갈, 심지어 남편과 도둑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우리는 여자의 담배에서 그 용기를 배워야만 한다. <대학생>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