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그동안은 주말이 없는 삶을 살았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일을 했고 오히려 그게 익숙했다. 아이들이 한창 클 땐 놀고 있으면 오히려 불안했고 집에서까지 잡다한 부업을 했다. 그게 딱히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돈으로 반찬도 사고 필요한 곳에 돈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몸보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며 살았겠지만 젊어서는 젊음의 시간이 귀한지 모른다. 남들이 영어학원에 다니며 토플이나 토익시험을 준비하느라 엉덩이에 땀띠 나게 앉아있던 시간에, 팔랑팔랑 뛰어다니며 놀았고 경력이나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할 동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이란 걸 해버렸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놓고 보니 서른이 훌쩍 넘어 있었고 일을 하려 해도 이력서 경력란에 써넣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운 좋게 잡지사 반 상근 기자로 취업에 성공했지만, 인터뷰 일정을 잡아놓고 아이들 봐 줄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결국, 그 일도 몇 년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됐다. 아이들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게 되면 두세 시쯤 집에 오는 애들끼리만 집에 있어야 하고, 그건 불안해서 할 짓이 못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아르바이트로 할 수 있는 일을 주로 구하게 됐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과천에 있는 샤브샤브 집에서 홀서빙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아들 둘을 등교시키고, 점심 장사하는 동안 일을 하고 학교가 끝날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대안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학비를 충당하기 힘들어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 홈페이지에다 ‘오늘의 일기’ 비슷한 글을 가끔 올렸는데 그걸 재밌게 읽고 나에게 논술 과외를 부탁한 학부모가 있었다. 그걸 시작으로 집에다 공부방을 열어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원에서 오랫동안 입시생을 지도한 경력이 있는 큰언니에게 영어를 맡기고, 서울대를 나온 동네 엄마를 끌어들여 수학도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논술을 가르쳤는데 맞춤법도 제대로 몰랐던 나인지라 논술 책을 사다 놓고 밤에 혼자 공부했다. 준비도 없이, 동네 아이들을 끌어모아 ‘야매’로 논술을 가르친 거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 뒤로도 오리공장, 물류센터, 대안학교 교사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처음으로 쉬어본 게 내 나이 마흔 후반, 쉰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일을 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인생은 ‘야매’에 가깝다. 뭐든 제대로 배워본 게 없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도 문학이나 작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창작’은 또 다른 문제였다. 서두는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지, 끝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몰라 끙끙댔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산다는 게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온전히 나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열심히만 살아오느라 놓치고 흘려버린 게 많다. 웃음도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 내기 바빴다. 여유가 있어 일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관리비가 밀리고 보험료도 내지 못해 실효가 나고 개 두 마리에 고양이 세 마리의 사룟값도 여전히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일을 쉬어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글 쓸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돈 벌기를 멈추었다.
일을 안 하고 놀고 있으니 앉아있으면 다리가 덜덜 떨렸다. 불안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을 벌어 쓰고 개 고양이 사료를 조금 저렴한 것으로 바꾸고 보험은 해약했다. 아침에 노트북을 챙겨 나와 허리가 아프도록 앉아있기만 할 때도 많았고, 다른 작가들이 쓴 글을 읽으며 질투와 부러움 때문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 평생 이런 글은 쓰지 못할 거라 좌절하면서...
어찌어찌 책 세 권을 세상에 내어놓았지만, 여전히 부끄럽다. 쓰면 쓸수록 참으로 모자란 내 재능을 탓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 일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후회를 안고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 삶에 방향키 같은 건 없었으며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눈앞의 것만 보고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너무 열심히만 살지 말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거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것저것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렇게 살아도 지구는 멈춰 서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일을 쉬었지만, 우리집 개 고양이들도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있다. 내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조바심내며 살아온 시간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한 2년 푸-욱 쉬고 나서 일도 다시 시작했다. 곱창집에서 일하다 잡지사에 들어갔고 서울까지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 그만둔 다음,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일 년 남짓 해왔다. 예전처럼, 돈만 보고 일을 하게 된 건 아니다. 내 글에 다양한 사람들의 캐릭터를 넣고 싶은 욕심도 크다. 편의점 일을 하며 ‘로또’라는 소설을 썼고 곱창집 일을 하며 ‘오순정은 오늘도’를 썼다.
그리고 지금은, 금토일 하루 4시간씩 동네 막창집에서 일을 하고 월화수목은 글을 쓴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우고 일까지 하며 악착 떨며 살아온 내 모습은, 죽지 못해 살아왔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싫어도 참고 묵묵히 견디며 열심히 일하면 조금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힘든 마음이 오래도록 쌓이면 병이 된다. 건강을 잃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 너무 열심히만 살지 말자. 최선을 다 하면 죽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이며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는 남는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서 ‘내가 없는 삶’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두지 말고, 너무 열심히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나이 쉰에서 예순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분간은 막창집에서 열심히 일해 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