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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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PC 삼립 시화공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또다시 발생했다. 이번 소설집 <오순정은 오늘도>에 나오는 <로또>에서 SPC에 대한 얘기를 언급한 것은, 그들이 사람 목숨을 얼마나 우습고 하찮게 여기는지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딸이었을 그분의 명복을 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사고를 당한 사람이 나일 수도, 내 가족일 수도 있다는 거다. 두 아들은 학교 다닐 때 알바를 많이 했다. 건설 알바, 음식점 알바, 육가공 알바 등등. 그나마 제일 안전한 환경에 속하는 음식점 알바를 하면서도 팔뚝이며 손에 화상을 여러 번 입었다. 건설 현장 알바를 하고 와서는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말도 자주 했다. 시급을 많이 주는 곳일수록 일이 험하고 고달픈 건 감수해야 할 옵션이었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아이들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오산의 물류창고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이 일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알바보다 조금 더 많은 시급 때문이었다. 어차피 힘들 거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는 일에 내 노동력을 팔고 싶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눈곱만 대충 떼고 수원역으로 나갔다. 파출소 앞으로 통근버스들이 와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비슷한 버스들이 대략 비슷한 곳에서 잠시 섰다가 올라타는 사람들만 후딱 태워 가버린다는 거였다. 그 버스를 놓치면 하루 일당을 공치고, 공치지 않으려면 택시라도 잡아타야 하지만 그건 일당의 1/3을 날리는 일이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통근버스에 올라타 물류창고에 도착하면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만큼 넓은 창고로 내려간다. 내가 일하던 곳은 ‘상온창고’였다. 상하지 않는 물건들을 분류해서 택배 트럭에 실어 보내는 곳이다. 출근 카드를 찍은 다음 우리는 모두 우렁찬 음악에 맞춰 국민체조를 했는데 몸을 풀어주지 않고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가는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체조가 끝나면 정해진 자기 자리로 가서 일을 시작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상태에서 여름 해가 뜨고 서서히 물류창고가 달궈지면 마치, 겨울옷을 껴입고 찜질가마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 된다.

내가 맡은 일은, 쏟아지는 택배들의 바코드를 찍어 구역별로 분류해 렉에 실어야 되는 일이었다.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막 쌓는 게 아니라 무거운 건 아래, 가벼운 건 위로 가도록, 그리고 틈이 생기지 않게 테트리스 블록 끼워넣기처럼 잘 맞춰 넣어야 한다. 생각 없이 대충 하다가는 다 끌어내려 다시 쌓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눈총을 받아야 했다. 오전에 정신없이 짐을 쌓아 올리고 나면 오랑우탄처럼 축 늘어져 팔과 다리를 질질 끌고 점심밥을 먹으러 간다. 물컵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 툭 떨어트린 적도 많았다.

식당에 앉아 있으면 누구 하나 말 걸어주지 않고 이름도 묻지 않는다. 물류센터에서 오래 일을 한 고참 끼리 모여앉아 왁자지껄 웃고 떠든다. 나도 끼고 싶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여자 알바 대부분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고 나갔다. 그래서 이곳에선 서로의 이름이나 신상을 묻지 않는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 건 이 일을 시작한 지 2주째 되던 날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걸 눈여겨 본 고참 언니가 점심시간에 나를 불렀다.

“어이. 안경 쓴 너. 여기 와서 먹어.” 코가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일이 힘든 건 둘째 치고 아무도 말 한마디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모르는 걸 물어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어 외로웠다. 그래서 고참 언니가 부르자마자 식판을 들고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언니는 말이 별로 없었고 어쩌다 한마디 할 때도 입을 크게 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사는 곳이 어디냐?”

“수원입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언니의 앞니 2개가 비어있었다. 그래서 말할 때 늘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전에 오리공장에 일하러 다닐 때 아저씨 한 분이 밥을 먹고 나오며 이쑤시개를 몇 개나 챙겨나오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없는 사람은 이빨부터 망가져.”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고참 언니와 말을 텄다.

일하는 요령과 물건을 분류하고 쌓는 것을 다시 하나하나 가르쳐줬다. 네모난 팔레트 위에 가전제품이나 커다란 물건들을 각 맞춰 쌓아 올리고 랩으로 아래부터 감아올리는 일도 가르쳐준 대로 하자 훨씬 쉬워졌다. 모든 일에는 요령이 필요했고 오래 일한 사람은 그걸 알았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쌓아 올리고 분류한 렉을 지게차가 씽씽 다니는 물류창고를 가로질러 구역별로 끌어다 놓으면 하루일과가 끝난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0시간씩 일을 하고 통근버스가 수원역에 날 토해놓으면 밤이다. 집에 들어가면 애들이고 뭐고 누울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 새벽 6시까지는 잘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눈을 감지만 알람 소리를 놓칠까 봐 깊이 잠들 수도 없는 일상이었다.

그때 당시,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었고 방학 동안에만 알바를 할 수 있으므로 한 달을 채우고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일이 끝나던 날 고참 언니는, ‘다신 이런 데 일하러 오지 말라고. 여기서 몇 년 일하다 보니 이빨도 빠지고 먼지 때문에 폐도 다 상했다고, 관절 마디마디가 성한 데가 하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일하다 목숨까지 잃게 되는 거다. 안전시설에다 돈 쓰는 게 아까워 사람 목숨을 갈아 넣고도 책임지지 않는 기업.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모른 척 눈감아주는 나라...

‘이번 사고를 계기로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근본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겠습니다.’ 6년 전, 태안화력에서 청년 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는다.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말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6월 3일, 대한민국의 21대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며 약속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협하고, 부당하게 약자를 억압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 약속이 꼭 지켜지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태안화력과 SPC 기업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사건에 대해 새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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