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첫째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일이다. 돈이 정말 똑 떨어져 버린 어느 날, 가지고 있던 통장을 모두 꺼내놓고 혹시라도 잔고가 남아있는 게 있을까, 뒤져보다 농협 통장에 14000원 정도의 돈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얼른 아이 둘의 손을 잡고 농협으로 갔다. 그리고 창구 직원에게 가서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찾겠다고 말했다.
“저희가 이사를 가는데 그 동네엔 농협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잔고를 다 찾는 거거든요.”
아무도 묻지 않는 말을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잠시 뒤, 은행직원이 플라스틱 사각접시에 통장에 남아있던 돈을 담아 내밀었다. 그런데 돈이...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그 순간, 딱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저 돈을 들고 빨리 은행을 빠져나가자!’
돈을 정신없이 주머니에 쓸어 담고 양쪽에 아이들 손을 쥐고 정신없이 은행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고 있었는데 가져간 우산도 챙기지 않은 채 누가 잡으러 오기라도 할 것처럼 뛰다시피 그곳을 벗어났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엄마를 따라 뛰었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10만 원 정도 되는 돈이 내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당장 애들 반찬 사 먹일 돈도 없던 상황이라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뛰듯이 걷고 있는데 아이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엄마, 배고파….”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선가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났다. 그제야 나는 비 맞은 아이들 머리를 털어주며 근처 돼지갈빗집으로 들어갔다. 2인분을 시켜 아이들에게 고기를 구워주자 제비 같은 입을 오물거리며 맛나게도 먹었다.
“엄마, 꼬기 맛있어, 꼬기!”
고기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둘째이지만 요즘 들어 고기반찬을 해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작년까지 친정집에 얹혀살다 우리끼리 살아보자고 호기롭게 집을 나왔지만 대출받은 돈으로 월세 집 보증금은 마련했지만 매달 나가는 월세며 생활비, 대출 이자까지...
도저히 남편 월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돈이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나까지 나가서 돈을 벌 수 없을 때였기에 모자라는 돈은 신용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메꿨다. 그러다 카드 돌려막기가 시작되고 빚이 늘어났다. 큰소리 뻥뻥 치며 친정에서 나오긴 했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도 없는 신용카드를 그어 쓴 건지도 모른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친정만 바라보고 앉아있는 막내 동생의 철없음을 뜯어고치기 위해 언니들은 엄마에게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게 했고 그 결과 내 주머니엔 돈이 씨가 말라 버렸던 거다.
은행에서 주는 대로 돈을 쓸어 담아 정신없이 나오긴 했지만. 한숨 돌리고 나자 그제야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실수로 나에게 돈을 더 많이 내어준 직원이 그 돈을 물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유 없이 돈을 더 많이 줬을 리는 없지 않을까.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통장을 꺼내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자 ‘김영자 100,000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언니들이 나에게 더 이상 돈을 주지 못하게 하자 엄마가 반찬값이나 하라며 몰래 10만 원을 넣어둔 모양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은행에서 정신없이 도망친 거였고.
잘 구운 고기 한 점을 집어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에 걸려 넘어갈 거 같지 않더니, 그게 엄마가 보낸 돈이란 걸 알고 나자 고기가 넘어갔다. 사이다도 시키고 맥주도 한 병 시켰다. 그날 아이들과 나는 돼지갈비를 원 없이 먹고 그곳을 나왔다.
나 스스로 열심히 일 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 손을 잡고 은행에서 도망치듯 나왔던 그날의 일. 부끄러웠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적은 돈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매달 빚을 갚고 더 이상 카드도 쓰지 않았다.
돈 많고 능력 있는 남편 덕에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여자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물론, 지금도 부럽다). 하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기보다 내 몸을 움직여 정직하게 돈을 벌고 살아온 인생이 후회스럽진 않다.
지금도 나는 막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통장에 찍히는 정직한 숫자가 좋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로또에나 당첨되면 모를까, 내 통장에 돈이 고여 있는 그런 날이 올까 싶지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볕들 날도 오지 않겠나.
거기다 나는, 이제 믿을 구석이 없다. 하하…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