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탐방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오늘도 바로 들어갈거죠?”
“아뇨, 영화 보고 가려고요. 같이 볼래요?”
넷째 날의 마지막 영화는 (2021)였다. 부스를 마무리하고 광장 뒤쪽의 남은 좌석에 앉았다. 일이 끝나자마자 숙소로 돌아가기 바빴던 나의 예외적인 선택이 룸메이트 J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슨 영화냐고 물었다. 쉬운 답이지만 머뭇거렸다. 잘 소개하고 싶은 마음과 어쩐지 수줍은 태도가 공존했다. 거절당해도 크게 상심할 일은 아닌데, 이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간절해졌다.
“지난번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받았대요.”
그 시상식에서 최고로 영예로운 상이라는 말은 더하지 않았다. 고민하는 표정의 J에게 나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고, 큰 스크린에서 볼 기회를 기다렸다고 덧붙였다. 개봉 시기를 놓친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만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기다려도 그런 행운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어떤 기회인지를 말하고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와 달리 J는 단번에 짧은 고민을 마쳤다.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OTT에서 컨텐츠를 고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만, 큰 스크린 앞에서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빠르게 결정이 내려진다. 실내외 여부와는 상관없이 극장이라는 공간만이 지닌 중력이다.
우리는 저녁밥을 포기하고 나란히 앉아 영화를 기다렸다. 일을 마친 다른 스태프들도 하나둘씩 돗자리나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야외 상영이어서 자리는 끝없이 확장될 수 있었다.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광장에서 우리는 마침내 관객이 되었다. 낮엔 스태프, 저녁엔 관객이 되어 경계를 흐렸다. 대단한 것은 아니어도 어떤 선을 넘나드는 이런 순간이 좋다. 축제와 일터의 교집합인 영화제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스태프와 관객을 오가고 교차할 때 영화를 향한 확신에 가까운 사랑을 느낀다. 좋아하는 일이 노동이 되면 변심이 생길 수도 있다는 오래된 불안을 거스르는 희소한 순간이다.
청각장애인 가족과 살아가는 소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날 본 영화 또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그리고 있었다. 제목인 ‘코다’는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지칭한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전부 청각장애인인 주인공 ‘루비’가 바로 코다다. 오랫동안 조업에 종사해온 가족들은 베테랑임에도 불구하고 루비의 도움이 필요하다. 배 위에서는 위험을 알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육지에서는 청인들로 가득한 경매장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고등학생인 그녀가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에는 일을 돕는 것이 가족 모두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루비가 성인이 되고 자신만의 삶이 생긴다면 지속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그녀를 포함한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그 예민한 시기의 지각 변동을 들여다본다.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통역 혹은 대변인으로 분투해왔을 루비에게 새로운 것들이 밀려온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좋아하는 일이 생긴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어린 아이가 자아의 몸집이 커지며 자꾸만 울타리 너머로 뻗어간다. 본래 성장의 변곡점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함께 하는 삶이 익숙했던 가족에게는 벼락 같은 일이다. 루비 없이는 생업을 이어가기 어려울 뿐더러, 그 꿈이 소리의 영역에 있기에 더욱 문제가 된다.
하필 루비는 음악에 재능이 있다. 가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때나 큰 소리로 음악을 듣던 습관 때문인지, 얄궂은 운명의 장난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노래 부르는 일에 분명한 재능과 흥미가 있다. 이를 알아본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보충 수업을 시켜줄 정도다. 때론 환경이 마땅치 않다면 재능도 부담과 무게가 될 수 있다. 아직 서툰 것이 많은 사춘기 소녀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에게 어떻게 노래에 대한 꿈을 부드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가족들은 비장애 중심의 사회를 상대로 똘똘 뭉쳐 살아온 세월과 맥락이 있다. 축하나 응원을 건넬 여유가 없으니, 그녀가 일부러 멀어지려 한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반항하기 위해 일부러 음악을 택한 것이냐는 아픈 질문도 솟아오른다. 저마다의 사정과 맥락이 뒤엉킨다.
실은 우리 모두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상대를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내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면 실망감과 더불어 배신감까지 느껴진다. 무의식중에 상대를 타인이 아닌 나와 같은 존재로 느껴서다.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이일수록 상대가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른다. 섣부른 오해가 쌓여 억울한 상처를 받고, 오래된 흉터가 덩달아 욱씬거리기도 한다.
“나도 귀가 안 들렸으면 하고 바란 적 없어?“
유일한 청인으로서 소외감을 느껴온 루비는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질문을 건넨다. 가족들이 의도치 않게 발산하는 비장애인들을 향한 적대감과 경계심을 느껴온 것도 이유였으리라.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에 엄마 재키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루비가 용기를 내어 꺼낸 질문이기에 결심했다는 듯 진솔한 태도로 답변을 이어간다. 언젠가는 들이닥칠 일이라 각오했던 것일까.
“네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청력 검사를 했었어. 앙증맞고 귀여운 아가한테 온갖 측정기를 달아 놨는데 엄마는… 네가 못 듣길 기도했어.“
어느 정도 예상한 이야기지만, 상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루비는 이유를 묻는다.
”널 실망하게 할까 겁났어. 농인이라서 나쁜 엄마 될까 봐.“
평생을 장벽 속에서 살아온 재키는 소통의 한계로 자신의 엄마, 곧 루비의 할머니와 사이가 소원했다. 또다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가까운 사람이 생기고 그로 인해 멀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 딸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된 루비는 안심한다. 걱정 마. 엄마가 나쁜 엄마인 이유는 그거 말고도 수두룩하니까. 장난이지만 뼈가 있는 말에 모녀는 웃으며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한다. 애정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욕심과 착하지만은 않은 모난 대화여도 결국 사랑에서 출발한 솔직한 말들이다. 서툴러도 그 속의 진심이 서로의 마음에 정확하게 가 닿는다.
영화의 소리가 사라졌다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도 또 다른 과제가 밀려드는 것이 삶이다. 루비는 꿈을 펼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가족들 곁에 남아 머무르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편 가족들은 안전을 위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추가 인력이 있어야 다시 조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판결을 받는다. 어쩔 수 없지만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다. 누군가를 고용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을 뿐더러 수어를 할 줄 아는 청인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냉정한 현실을 자각한 루비는 꿈을 포기하고 가족 곁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반대로 그녀에게 다른 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가족들은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된 뒤에는 떠나려는 자와 붙잡는 자의 위치가 전복된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 가족은 잘 살았어. 가.”
동생이 꿈을 이루길 바라는 오빠의 마음은 하필 소외감을 받아온 루비에게 오해를 남긴다.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떨리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남매가 화해를 했는지 궁금할 관객을 두고 영화는 무심히 흘러간다. 객석에는 당연하다는 듯 오빠가 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찝찝한 표정도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동생을 응원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까짓 말 한 두 마디로 멀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별다른 시퀀스 없이도 강한 확신으로 전한다.
루비의 얼굴에도 처음이 주는 긴장과 설렘 뿐이다. 엄마가 준비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드디어 학교 강당의 무대에 선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 친구와 단둘이 부르는 노래는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루비의 인생에서, 어쩌면 영화의 서사 중에서 하이라이트가 될 순간이다. 그때 영화는 루비의 노래와 관객들의 박수를 포함한 모든 소리를 제거한다. 음향 사고가 의심될 정도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은 채 루비가 입을 뻥끗거리며 노래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녀의 무대를 듣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가족의 입장을 관객에게 체험시키기 위함이다.
카메라는 루비의 아빠인 프랭크로 시선을 옮겨간다. 그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다는 티를 내며 앉아 있다.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고 적당히 눈치만 보던 프랭크는 잠시 주변을 돌아본다. 음악을 즐기는 관객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황홀한 표정의 관객들과 대조적으로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진다. 딸이 정말로 반짝이는 재능이 있는데, 자신만 그 사실을 몰랐고 지지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감출 수 없는 표정에는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루비가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만 다르다는 소외감을 느꼈다면, 가족들은 세상을 상대로 늘 소외감을 느껴왔다. 하물며 자신의 딸이 가진 재능조차 알 수 없다면, 그 마음은 어디서 풀어내야 할까.
딸의 노래를 처음 듣는 날이었다
숙제들을 뒤로 한 채 가을 음악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프랭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히 웃으며 딸을 축하한다. 그가 느꼈을 감정은 관객만이 알고 있다. 루비의 음악 선생님 미스터 V는 가족들에게 인사하며 루비의 재능을 칭찬한다. 대학에 보내지 않는 것은 끔찍한 실수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미 꿈을 포기한 루비는 뒷말은 통역하지 않는다. 내일이 오디션이라는 사실도 숨긴다. 배려하기 위해 입을 다문 그녀와 달리 프랭크는 딸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로 한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남아 그녀가 불렀던 노래가 어떤 이야기였는지를 묻는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마음을 말하는 노래였어.”
“아빠한테 불러줄래?”
루비는 아빠의 눈을 보며 노래를 부른다. 입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던 프랭크는 그녀의 목에 손을 대고 소리의 진동을 감각한다. 딸의 노래를 알고 싶은 그는 더 크게 불러달라 청한다. 두 손과 눈으로 노래를 듣는 표정이 슬픔에 잠긴 듯 일그러진다. 영화는 청각장애인과 가족이 겪는 현실을 함께 조명하면서 그 성장통을 음악으로 풀어낸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특하고, 소리와 장애의 경계 속 얄궂은 설정이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이제 아빠는 딸의 재능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의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도 자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루비는 가족들의 협동 작전에 못이겨 오디션장에 도착한다. 오디션 자체를 포기하는 1차 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영화는 가족들이 오디션장에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극적 장치로 이용한다. 장애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면접장은 당사자 홀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그녀는 가족을 두고 전혀 행복하지 않은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다. 가족들이 루비를 필요로 했던 만큼 루비도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루비일지도 모른다. 오디션은 대학 진로를 결정짓는 등용문이지만, 극의 흐름에서는 그녀의 선택과 성장을 상징한다. 가족이라는 집에서 나아가 홀로 자신만의 인생을 구축해나가는 시작점이다.
미온의 관심이 가장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이렇듯 아직 준비되지 않은 루비가 노래로 타인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심사위원들도 별다른 이력이 없는 그녀에게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루비의 노래는 평소의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그때 가족들이 몰래 2층으로 들어와 객석에 앉는다. 금새 표정이 밝아진 루비는 파도를 타듯 자신감에 힘입어 노래를 이어가고 수어도 동반한다. 드디어 노래를 듣게 된 가족들에게 루비는 이야기하듯 진심을 담아 노래한다. 결과는 뻔하다. 반짝이는 재능에 진심까지 담은 노래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겠는가.
보통의 영화라면 심사위원들의 박수갈채와 미소를 띈 주인공의 모습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가족의 일상이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던 오빠도, 타인과 교류하는 일에 관심이 없던 엄마도 모두 일터와 일상 속에서 비장애인과 어울리고 있다. 상처로 세웠던 벽을 무너뜨리고 직접 소통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루비 없이도 일을 계속할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여전히 들리는 루비의 노랫말은 이제 인생을 양쪽(both sides)에서 보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이제는 서로 다른 쪽에서 양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된 가족과 장벽을 넘어 소통을 시작하게 된 사회의 풍경을 담아낸 복합적인 가사다.
인상깊은 것은, 루비가 합격 여부를 살펴보는 장면까지는 가족들과 함께지만, 그 결과를 알리며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은 선생님과 함께 하는 장면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알아보고, 격려하고, 수많은 가르침을 준 선생님 미스터 V와 가장 큰 기쁨을 나눈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루비는 다소 다른 발화법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청인 부모에게서 배운 말하기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포증으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을 갔던 루비는 다시 미스터 V를 찾아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밥 딜런의 일화를 들려주며 담백하게 힘을 주었다. 어떤 특별 대우나 무리한 공감 없이 그저 재능이 있는 학생 중 하나로 대하는 태도에 루비는 공포증을 이겨내고 수업을 즐길 수 있었다. 영화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멕시코 시티 출신인 미스터 V가 겪어온 수많은 경험들이 루비와 진솔하게 소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의 삶이 확장될수록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 재밌겠다”와 같은 종류의 호기심은 타인의 이야기를 구경하려는 마음가짐과 다를 바 없다. 좋은 영화는 그러한 관객들의 당연한 태도를 바꿔놓는다. 남성 주인공을 보며 여성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듯, 내 이야기처럼 몰입하고 감정의 전이와 확장까지 느낀다. 이번 영화 는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 있거나 새로운 플롯 혹은 형식을 지닌 예술 영화는 아니다.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안전하고 착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낯선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거리감을 좁혀 몰입시키고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생각들로 이끌어나간다는 점에서 충분히 훌륭한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남는 것을 넘어 실제 주변인들에게 추천하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그날, 평창의 광장에서도 가족 단위의 관객이 많았다. 모두가 함께 보기에 좋은 소재와 이야기여서도 있겠지만, 공간의 구분이 명확한 실내가 아니라서 아이들의 소음이 발생해도 괜찮은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청각장애인이 많이 등장하는 극의 특성상 영화의 소리보다는 화면이 중요했다. 약간의 소음이 발생해도 아무도 불편하지 않았다. 옆 사람이 영화나 공연 등의 관람을 방해하는 일을 ‘관크(관객+크리티컬)’라 부르며 비난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평화롭고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영화는 12세 관람가였다. 아이들이 이해할 만큼의 노골적인 대사나 관람에 주의가 필요한 장면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국 영화에 비해서는 성적 농담이나 설정이 많은 편이었다. 어른들이 웃는 동안 왜 웃냐는 아이들의 귀여운 질문이 곳곳에서 들렸다. 관람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리액션까지 영화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고 소통을 시작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처럼 관객들 또한 ‘관크’나 '노키즈존(No Kids Zone)’ 현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우는 광경이기에 더욱 유의미했다. 터무니 없이 많다고 생각했던 객석이 가득 들어찼다. 영화가 끝이 난 뒤, 마치 시상식의 한 장면처럼 큰 볼륨의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야외 상영과 관객들의 특성 덕분에 현실과 영화가 뒤섞이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