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오빠가 변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가끔 여행도 데려가고 콧바람도 쐬어주고 그랬는데 말이다. 동생인 내가, 해줘도 고마운 걸 모르니 이젠 땡이란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은 없지만 그걸 꼭 말로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내심 서운한 구석이 있었던가 보다. 얼마 전, 아는 분에게서 리트비아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길 들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오빠하고 같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추억을 더듬어 오빠 흉이나 좀 봐야겠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건설한 사람은 독일의 알베르트 대주교다. 그분의 고향이 브레맨이라 독일이 <브레맨 음악대>의 동상을 만들어 리가 시에다가 기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리가의 올드시티 중앙에 그림형제 동화에 나오는 '브레맨 음악대'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브레맨 음악대 동물들의 주둥이가 다들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밑에 있는 당나귀의 주둥이가 최고로 금빛이었다.

그 이유가 동물들의 입과 발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했다. 재미 삼아 나 역시 당나귀의 맨들맨들한 황금빛 주둥이를 비비며 소원을 빌고 있었다. 그때 내 뒤쪽에 서있던 외국인 할머니 한 분이 날카롭고 빠른 말투로 나에게 뭐라뭐라 쏘아붙였다. 그냥 별 신경 쓸 일은 아닌 듯하여 청동으로 만든 동물들을 한 번씩 더 쓰다듬어주고 돌아서려는데 오빠가 조금 전 그 할머니에게 다가가 화난 얼굴로 뭔가 얘기하는 게 보였다.

브레맨 음악대 동상. ⓒ위클리서울/픽사베이
브레맨 음악대 동상. ⓒ위클리서울/픽사베이

'왜 또 저러는 거야..?'

잠시 뒤,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오빠가 말했다.

"내가 그 할머니한테 뭐라 하는 거 봤냐." "봤지." "어땠냐?" "뭐가 어때?"

자기가 사진 찍고 있는데 내가 앞을 가렸다고 화내길래, '잠시 기다렸다가 찍으면 되지 않냐'고 한 마디 해줬다는 거다. 그랬더니, 사진 찍고 있는데 시야를 가린 당신 동생 잘못이 아니냐며 할머니가 따졌다고 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여기 다들 줄 선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진 찍는 거를 어떻게 일일이 다 알겠냐. 내 동생이 뭘 잘못했냐!! 이렇게 받아쳤지. 그랬더니 확 가버리대. 내 참 기가 막혀서."

사실 기가 막힌 건 오히려 오빠 쪽이다. 내가 잠시 비켜주었다가 할머니가 사진 찍고 나면 다시 가서 만져도 되는 거였다. 게다가 할머니가 뭐라 했다한들 혼잣말 정도였을 거다. 근데 그걸 뭐 하러 따박따박 따지고 앉아있냐 이 말이다. 하여튼.. 쯧쯧...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빠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오빠는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예민해졌다. 하루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가 보다. 아파트 마당에는 또래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공이 내 쪽으로 굴러오자, 공 좀 차달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마른 하늘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야 이 새꺄! 너 지금 내 동생한테 뭐라 그랬어!!"

갑자기 하늘에서 울려 퍼진 천둥같은 소리에 남자애들은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봤고 거기엔 천둥신 토르가 아닌, 까만 뿔테 안경을 쓴 '기껏 대학생 하나'가 눈을 부라리고 서있었다.

남학생들은 '우리가 뭘?' 이라는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이유도 모른 채 냅다 튀었다.

집에 들어온 나는 책가방을 집어 던지며 오빠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내가 동네 쪽팔려 죽겠다고!!!"

그리고 또 한번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대전에 살 때였다.

하루는 엄마가 전화해서 다짜고짜 막 화를 냈다.

"니가 전화를 안 받아서 오빠가 지금 차몰고 대전 내려가고 있잖어. 왜 전화를 안 받아서 오빠 걱정하게 만들어!"

아니, 낮잠 좀 잔 게 죄야? 나는 기가 막혀서 콧물이 다 났다.

오빠에게 전화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내려오라 했냐고!!"

그러자 오빠는 차를 돌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 오빠는, 동생들 잘 보살피고 시집도 잘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책임감 때문에 저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땐 정말 짜증이 났다. 오빠 때문에 친정 가서도 남편 흉 한번 맘 편히 못 해 보고 살았다. 눈물이라도 보였다간 남편에게도 천둥처럼 소리를 질러댔을지도 모른다.

"너! 그럴 거면 왜 데려갔어!!"

시간이 흘러 나중 나중에...

오빠가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되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했지요?"

"그래. 가끔 오바하긴 했지만 잘했다 쨔샤. 한번 업어주까 마!!“

말하진 않았지만, 아빠가 일찍 떠나버린 자리... 그래도 오빠가 채워줘서 덜 외로웠다.

여행도 데리고 다녀 주고, 맛있는 거도 사 주고, 시집도 오빠가 번 돈으로 잘 보내줬다. 고맙다고 말하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번 추석 명절에 오빠집에 가면 두 눈 딱 감고 이렇게 한 번 말해버려?

"오빠야 고맙다. 애 써준 거 내도 다 안다."

으~~~ 닭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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