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디자인=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아침에 눈을 뜨니 남편은 벌써 없다.

어제 출장에서 돌아와 오늘은 사람들을 인솔해 DMZ에 철새를 보러 간다고 했다. 주말도 없이 늘 바쁜 사람이라 아이들이 어렸을 땐 참 많이도 싸웠다.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퇴근 시간 딱딱 맞춰 들어와 애들을 봐주는 것도 아니었다. 에너지 넘치는 아들 두 놈을 키우는 내내 곁에 있을 때 보다 없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무난한 성격의 둘째에 비해 태어날 때부터 예민하고 자주 아팠던 첫째는 열이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될 정도로 엄마 애간장을 태웠다. 그랬던 첫째가 23년 전 오늘,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강남 OO병원에서 제왕절개로 큰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라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지만 통 골반이라 제왕절개 밖에 답이 없다고 했다. 남편도 나도 어린 나이였고 경험이 없어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10월 27일로 날을 정하고 하루 전인 26일에 입원을 했다. 월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침 일찍,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치고 들어간 수술실은 너무나 추웠다. 이빨이 부딪혀 딱딱 소리가 날만큼.

간호사들은 이른 아침이라 몹시 피곤해보였고 주말에 단풍놀이 다녀온 이야기 등을 가볍게 낄낄거리며 주고받고 있었다. 난 너무 추웠고, 무서웠고, 긴장 때문인지 배가 딱딱하게 뭉쳤다. 무심한 그들의 가벼운 농담과 어수선한 수술실 분위기 탓에 더 불안했다. 거기다 생전 처음 꽂아본 소변 줄은 또 얼마나 기분 나쁘던지….

누구든 붙들고 얇은 담요라도 하나 덮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춥고 무서웠지만 그런 나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데 담당 의사가 들어왔고 수술이 바로 시작됐다. 메스를 들어 내 배위에 금을 긋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느낀 통증은 뭐랄까….

커다란 쇠뭉치를 불에 달궈 내 배에다 푸욱 찔러 넣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아이를 낳는 건 집 한 채를 무너트릴 만큼의 고통이 따른다고 사람들이 말했으니까. 그런데 몇 초 뒤, 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시 푸욱… 또 다시 푸욱….

“으아악~~~!!”

세 번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 아파 도저히 내 힘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ㅇㅇㅇ 산모 마취체크 안했어요?”

“아… 그게…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바로 수술을….”

“아니, 지금 그게 말이 돼?!”

물론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마취도 안 된 상태에서 의사가 내 배에다 칼이 그어져버린 거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의료 사고였다. 그 이후, 주사약이 다시 들어가고 나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난 걸 확인한 간호사가 내 배를 꾹꾹 눌러 오로(출산 후, 자궁 및 질에서 배출되는 분비물)를 빼냈다.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조금 전 수술실에서 생배를 찢었을 때의 고통에 비하면 그나마 참을 만 했다.

일반병실로 옮겨진 후,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엄마 이짜나, 의사가 마취도 안 하고 내 배를….”

“얼마나 아팠냐면 진짜… 엉엉~~”

“됐다 됐어. 의사선생님이 아들 낳게 해주셨잖니.”

“의사선생이 뭔 아들을 낳게 해줘. 그리고 그거랑 의료사고랑 뭔 상관이야. 내가 얼마나 무섭고 아팠는지 엄만 모르면서 엉엉~~”

하지만 엄마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래도 아들 낳았으니 된 거라고, 다 잘 된 거라고…. 거기다 의사선생에게 줄 최고급 양주까지 감사선물로 사왔다고 했다. 그땐 내가 어렸고 뭘 몰랐다. 그래서 엄마가 됐다고 하니 된 거라고 넘어갔지만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는 게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선생이 병실에 회진을 왔다. 적어도 사과 한 마디는 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내 배를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림같이 꿰매졌네요. 흉터도 하나 안 남겠어. 하하!!”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과를 하는 순간 자기 입으로 의료 사고를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니 그런 식으로 그냥 넘어가자 싶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바보 같았는지, 남편이라도 내 편을 들어 수술실에서 있었던 실수를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땐 둘 다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아이가 별 탈 없이 태어났으니 된 거라고 말했고 나도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2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해마다 큰애 생일이 되면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엄마한테 진짜 잘해야 돼. 내가 너를 생배 찢어서 낳은 사람이야.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이 되냐?(앞으로 이 말을 아들에게 몇 번이나 더 울궈먹을 수 있을까ㅎㅎ).

뱃속에 아이가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10개월을 고이고이 키우고 낳아서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을 해도 엄마는 으레 그런 사람이려니 생각하는 게 자식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첫 애를 낳아 키우다 보니 너무 힘들고 지쳐 둘째가 생겼을 때는 지울 생각부터 했던 게 두고두고 미안하다. 늘 바쁘기만 한 남편과 살며 아이들에게 화내고 짜증낸 순간들도 많았다.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 얹어 놓은 것처럼, 마취가 안 된 상태로 배를 찢었던 그 고통처럼 느닷없이 밀려드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다. 돈이라도 많았으면, 남편이라도 내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실은 그거보다 내 탓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떠 남편이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부터 아이들과 집 안에 갇혀버린 죄수처럼 우울하게 살았던 내 모습이 지금은 후회된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되는 거냐고 남편과 아이들을 원망할 때도 많았다. 더 많이 웃고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나 혼자도 얼마든지 잘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23년 전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주어졌던 부당한 고통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고 제대로 사과 받고 싶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내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혼자 징징대기만 했지 당당하게 문제를 해결하진 못하고 살았다. 남편에게 육아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 말할 때도 함께 해결해나가려는 노력보다는 감정적으로 퍼붓고 비난할 때가 많았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만 남는데도 말이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제대로 사과 받지 못한 사람은 살면서 두고두고 후유증을 겪는다. 거기서 파생된 분노와 후회, 우울한 감정이 주변 사람들을 할퀴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제때 소독하지 못해 덧난 상처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는 피하지 말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잘못했으니 사과하세요.’

설령, 사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아야 하는 거니까.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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