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연재> 고홍석 교수의 산내마을 '쉼표찾기'

`Weekly서울`이 연재하고 있는 `쉼표 찾기`는 오랜 학교생활과 사회활동 후 안식년을 가졌던 전북대 농공학과 고홍석 교수가 전북 진안군 성수면 산내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고 교수는 2004년 3월 전북 전주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이 한적한 산내마을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갔다. 고 교수의 블로그에도 게재된 이 글들은 각박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아주 좋은 `쉼표` 찾기가 될 것이다. 고 교수는 `Weekly서울`의 연재 요청에 처음엔 "이런 글을 무슨…"이라고 거절하다가 결국은 허락했다. `쉼표찾기`를 위해 산내마을에 들어간 고 교수는 지금도 시끄러운 정세와 지역현안들로 바쁜 사회참여활동을 하고 있다. <쉼표 찾기>를 통해 산내마을에서의 생활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적절히 섞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Weekly서울`은 고 교수가 부인과 함께 산내마을로 이사를 가기 직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쓴 모든 글과 사진들을 거르지 않고 연재하고 있다. 때론 낙엽지는 시기에 새싹 피어나는 이야기를, 눈 내리는 한 겨울에 여름 무더위 이야기를 접하는 일도 있겠으나 그 또한 색다른 재미가 될 듯 싶어 빼놓지 않고 게재한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더디게 다가오는 가을 앞자락을 느끼며(8/11)

보고서를 쓰느라고 꼬박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밖을 내다보면,
앞마당이고 뒤안에 제멋대로 자라버린 풀들이
짜증나도록 한결 덥게 한다.

오늘 드디어 보고서 완료.
일로부터 해방이다.
일을 마친 다음의 느긋한 환희,
무릇 일과 쉼은 조화를 이루어야 살 맛이 나는 것이니.

땡볕에 고추 수확으로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마을 이웃들에게는
그저 나는 도시와 시골의 어설픈 `경계인`일 뿐….

뒤안에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비닐 봉지에 가득 따오고,
손톱 사이에 풀물이 들도록 풀들을 뽑아주고,
선배가 보내준 메일에 실린 겨울산 눈꽃을 보니
더디게 다가오는 가을 앞자락이 느껴진다.
내친 김에 겨울까지도….

지나간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8/13)

라이너 마이아 릴케는 여름을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
지나간 여름은 위대했습니다.
태양의 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
광야에 바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일년의 마지막 과실이 열리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주십시오." 금년 여름은 릴케가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땡볕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해발 400미터에 가까운 곳이라서 비교적 서늘한 곳이라고 하는데, 한낮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도시만큼이나 덥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해가 지고나면 서늘해서 잠을 설치는 밤은 없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계절의 순환은 정직한 법, 앞 마당에 국화가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꽈리도 빨갛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대추는 이젠 그 크기가 다 큰 듯 제법 엄지 손가락만하게 토실토실해졌습니다. 옹골진 마음이 들어 툭 따서 깨물어 보면 아직은 풋내가 납니다. 우리가 덥다고 짜증내고 있는 동안에 나무는 햇볕 에너지를 물씬 받아 열매를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울토마토는 이제 날마다 거의 30여개 이상을 따니 쉼표 부부가 먹고도 남아 오는 이들에게 한 봉지씩 나눠주기까지 합니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하니, 비가 오면 이제 슬며시 가을 앞자락이 보일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가을 바람이 소슬하며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는 쓸쓸한 조락의 계절이 되면, 이 땡볕 더위는 또 금새 잊어버리고 여름의 햇볕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인간들은 자기 본위의 간사함으로 피복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  꽈리가 빨갛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  그래도 앵두는 솔찬하게 많이 열려서 앵두술도 담궜는데, 살구는 새들이 모조리 쪼아 먹어버려 겨우 몇 개 맛만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는 대추 수확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벌써 나눠 먹을 사람 얼굴들이 떠올라 흐뭇합니다.

산에 오르니 가을 내음이…(8/15)
 
다음 주 목요일 인도네시아 린자니(3,726 미터) 산행을 떠난다. 작년 말레지아 키나발루(4,095 미터)를 오르면서는 해마다 고도를 1,000 미터씩 올려서 적어도 6,000 미터까지는 죽기 전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키나발루에서 고산증세로 시달리고 난 다음 당초 작정을 수정하여 오히려 고도을 369 미터나 낮추어 린자니로 결정한 것이다.

작년 키나발루 산행을 떠나기 전에는 지리산 종주 2회. 설악산과 덕유산 종주 1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을 오르면서 사전 연습을 충분히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산증세는 산행 실력이나 사전 연습과는 무관한 셈이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컨디션을 체크하기 위해서 연석산을 올랐다. 7월 26일에 천관산, 7월 30일에 덕유산을 다녀왔으나. 보고서 준비로 8월 들어서는 한번도 산을 오르지 못했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만 잔뜩 끼어서 산행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능선에 오르니 바람이 다르다. 후덥지근한 열기를 녹진하게 담은 여름 바람이 아니라, 얼굴에 맺힌 땀을 식혀주는 청량감이 드는 바람이다. 이미 바람에는 가을 내음이 스며 있다. 등산로에 상수리가 떨어지고 다람쥐가 부산떨며 쏘다니는 꼴을 보니 숲에도 벌써 가을 앞자락이 다가와있다.

그런가 하면 이미 서둘러 푸르름을 잃고 성질 급하게 떨어진 이파리도 바람에 뒹군다. 서둘러 떨어진 이파리와 끝끝내 버티다가 떨어질 이파리 사이의 시차라는 것이 얼마나 될까. 죽어야만 다음 해 봄에 소생하는 나무와 달리 인간들은 죽음을 순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며 바둥거리는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계곡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니 시리다. 돌틈에 낀 이파리가 쌓여 치우니 시원스레 물길이 세차게 흐른다. 계곡 물이 시린 것으로 보아 여기에도 가을 내음이 스며든 것이다. 매미도 여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쉬운 듯 숲을 흔들듯이 소리를 질러댄다. 일곱 해 동안의 침묵과 극기를 하였으니 남은 이레 동안의 순간을 목청이 터진 듯 어쩌랴.

산에 오르니 이른 가을 내음을 맡을 수 있다.



▲  구름 사이로 아득히 보이는 봉우리가 린자니 정상(3,726 미터)이란다. 가슴이 설렌다.


▲  정상에 오르면 세가라 아낙 호수가 있으며, 그 호수에 직경이 6km나 되는 바뚜루라는 거대한 분화구가 있다.


▲  린자니 산은 1901년 화산작용을 그쳤지만 1942년 호수 밑에서 작은 화산이 새로 형성되어 지금도  그 분화구에서 40분마다 가스가 분출하는데 대포 소리처럼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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