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고창 모양성에서 만난 풍경 둘

연록의 나라

꽃은 화려해서 돋보인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움을 표출하며 다가오는 것이 있다. 이제 갓 고개를 내민 새싹들의 얼굴이다. 색깔이 어찌도 그렇게 연한지 금방이라도 온통 물들여질 것만 같다. 주변을 시작으로 하여 온 우주를 파릇파릇한 색깔로 바꾸어버릴 것만 같다. 꽃은 꽃대로 가슴에 닿지만 새싹들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다.

새싹의 모습은 아기 손을 닮아 있다. 옴지락거리면서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하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아기의 손이다. 거기에는 욕심이나 추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명의 모습인 것이다.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경이로움을 연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새싹은 바로 그 것이다. 힘이요, 희망이다.

파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구를 위하여 다가오는 것일까. 온 몸에 전해지는 감미로운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옹알이 하는 아기의 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알아들을 수는 어렵지만, 그 의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모양성은 온통 힘과 열정으로 넘쳐나고 있다. 꽃이 만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록의 새싹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삭이는 새싹들의 이야기가 설레게 만든다. 소곤거리면 은밀하게 전해주는 소식은 온통 희망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유혹하고 있는 연록의 새싹들에게서 배운다. 그들의 열정과 정신 집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이 고개를 내밀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숙연해질 정도다. 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오직 한 가지 일만을 생각하며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삭풍의 심술과 눈보라의 시련이 결코 작지 않았음에도 정신력으로 이겨낸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염원.

그 것은 새싹을 틔어내야 하겠다는 강한 의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내고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겪어내지 못하면 결국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봄이 오면 연록의 새싹을 틔어내기 위하여 온 힘을 집중한 것이다.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뿌리는 바로 새싹에 있었다.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을 모두 다 이겨냈기에 그 결과는 황홀하다. 온 우주를 경이롭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뚝한 모습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 설레게 하는 것이다. 새싹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열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되고 목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극복해야 한다. 찾아오는 운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험로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예외는 없다. 빗겨갈 수 없고 피한다고 하여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싫어도 걸어가야 하고 부정하여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겨울을 이기고 새싹을 틔어낸 것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운무를 헤쳐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자가 될 뿐이다. 내가 운무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새싹처럼 당당하게 맞서야 하고 그리고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해내야 한다.



운무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정신 집중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의 일에 집중하여 그 것을 성취할 때까지 열정을 다 하는 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인 것이다. 조금 힘들다고 하여 주저앉고 어렵다고 하여 돌아가려고 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새싹이 그 것을 말하고 있다. 연록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일념으로 정신을 집중하였기 때문에 겨울을 이겨낼 수 있지 않았는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것을 해내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힘을 분산시키게 되면 해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초조하다고 하여 방방 뜨거나, 횡설수설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의외에 해결책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가까이 있을 수 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고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면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

새싹이 창조하고 있는 연록의 세상이 가슴에 꽉 찬다. 연록의 한 가운데에 서서 신선함과 싱그러움을 만끽한다. 묵은 지난 것들이 모두 다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워진 안에는 연록의 상큼함과 향기가 배어들고 있다. 새로운 기운을 받게 되니,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꽃과 시간 그리고 지천명

모양성 아래의 판소리 박물관에도 봄이 만개하고 있다. 금빛 잉어가 여유를 즐기면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의 움직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은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통해 안하무인(眼下無人)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또 다른 세상이 들어온다. 봄은 생명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의 경이로움까지 창조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활기 넘치는 모습만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한정적인 나의 생각을 반성하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루살이의 시간과 잠자리의 시간 그리고 사람의 시간과 영생의 시간은 모두 다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이지만, 사람의 일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루살이를 비웃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시간에 대한 이런 생각은 판소리 박물관의 바로 이웃에 있는 동리 신재효 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이에 꽃을 활짝 피어낸 동백이 그렇고 그 아래에 이제 꽃을 피워내려고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꽃 잔디를 통해 알 수 있다. 빨갛게 열정을 발하고 있는 동백꽃과 이제 갓 피어나려고 하는 꽃 잔디 꽃의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저마다 독특한 세계가 있음에도 그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독특한 세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은 보지 않고 똑같은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개성을 존중하고 함께 즐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날마다 아름다운 날들이 될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또한 오늘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 것을 착각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또한 오늘 같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는 이런 생각을 더욱 고착시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런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기준을 달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준을 달리한다는 것은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준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활짝 핀 동백과 이제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꽃 잔디의 모습은 분명 다르다. 물론 아름답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아름다움에도 차이가 있다.



둥글둥글 기쁜 듯 피어나려고 하고 있는 꽃 잔디의 꽃봉오리에서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오늘이 아름다운 것은 내일 만개할 수 있다는 기대와 바람이 있기에 우뚝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이고 화엄 세상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한다. 화엄의 세상은 삼천대천세계라고 하였다.

기준을 달리하고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게 되면 수많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 곳은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있는·세상이다. 그 곳에는 새로움이 날마다 피어난다. 단조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숨 가쁘게 벌어지는 오묘한 변화에 푹 젖어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은 저절로 피어날 수밖에 없다.

동백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그 세상대로 아름답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우니 흠을 잡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꽃 잔디 꽃이 만들어내는 세상 또한 아름답다. 희망이 있고 설렘이 있으니,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워진다. 활기가 넘쳐나고 가슴에 그득 채워지는 만족감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동리 신재효 고택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지천명을 생각하게 된다. 공자님께서는 마흔의 나이를 불혹의 나이라 하였고 쉰의 나이를 지천명의 나이라고 하였다. 불혹이란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고 지천명이란 하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지천명의 확실한 것은 미혹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짐작을 해본다.

동백의 꽃은 꽃대로 존중해주고 꽃 잔디의 꽃의 경이로움을 찾게 되면 순간순간이 새로워진다. 지금 여기가 빛나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돌아다보면 후회가 앞선다. 순간의 소중함을 다가오지 않은 미래로 인해 깨닫지 못한 것이다. 흘러간 과거에 집착함으로서 오늘을 소홀하게 한 것이다. 어리석음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지천명이란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동백의 아름다움과 꽃 잔디 꽃에서 찾을 수 있는 지혜를 아는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닐까. 동양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동리 선생님의 우뚝함이 그래서 더욱 빛나는 것이다. 판소리 열 두 마당을 완성이 그 것을 말하고 있다.

꽃 앞에서 행복해진다. 실패한 지난날도 절대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것의 체험이 다가올 미래에는 아주 소중하게 사용되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 아닌가. 당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 모르나,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갓 피어나려고 하는 꽃봉오리의 경이로움에서 지천명을 생각하였다. 

keesan@hanmail.net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한국아동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월간 아동문학 신인상,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녹색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