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독립선언서 배포하다가 옥고 치르기도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을 200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이달 30일까지 민족전통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에서 태어난 김성숙 선생은 1916년 양평의 용문사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 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 참여해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 본회 및 각 지방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국내에서 조국광복운동에 진력을 다하던 중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으며, 조선의열단에 가입,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광저우(廣東) 지역으로 옮긴 선생은 1928년 한국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1936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의용대에 참여해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1월 26일에는 3·1절기념주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상하이를 출발, 군산에 도착했고 이튿날인 2일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1947년 4월 선생은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고, 당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노력을 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인해 1949년 12월 해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1·4후퇴’시 부산으로 피난 온 선생을‘부역’혐의로 체포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사회대중당에 참여해 정치위원으로 활동했고,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연맹 중앙협의회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64년 신한당 창당에 참여, 보수정치세력에 합류한 선생은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과 지도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어느새 선생의 나이는 70을 넘었고, 남은 건 병고와 가난뿐이었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동지들의 주선으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피우정避雨亭’이라 칭했다.

말년에 약값 마련도 어려운 가난에 묻혀 지내다,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유해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른 후 파주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2004년에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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