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선물

향기 나는 사람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름답다. 부드럽고 감미롭다.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이든 상관없이 여유롭다. 여름의 열정과는 사뭇 다르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이 시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넘치는 에너지로 인해 결국은 눈을 돌려야 하고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런데 가을은 아니다.



가을은 어디든 편안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넘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다. 얼마든지 오래 바라볼 수가 있어 좋다. 생각을 깊게 할 수가 있어 즐겁고 좀 더 깊은 곳까지 사색할 수 있어 기쁘다. 말초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심미적 안목으로 세상을 직시할 수 있어 좋다. 진지하게 사고하고 심연을 분석할 수 있다.

바라보기 위해서는 눈을 동원해야 한다. 우주의 모습을 감지하는 기관은 5 가지가 있다. 귀를 통해서는 소리를 감지할 수가 있고 혀를 통해서 맛을 감지할 수 있다.
 
코를 이용하여 냄새를 판별하며 손을 이용하여 느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각 기관을 동원하여 감지하게 되는 세상의 모습을 믿지 못한다. 신뢰성 측면에서 볼 때는 현저하게 낮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감각 기관은 바로 시각이다.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한 신뢰성은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귀를 통해서 듣는 소리는 먼저 의심부터 하게 된다. 분명한 사실인가 아닌가를 의심한다. 그러나 눈으로 본 것은 확인해보지도 않고 믿어버린다. 당연히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습관적으로 믿어버린다. 분석하거나 반추해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청각 이외의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다. 맛을 보고서도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촉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후각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더 떨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진화해왔다. 의도적으로 그리 되었는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이 시각 의존적으로 살아온 것은 분명하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 이 말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우리의 의식세계에 고착되어 있다. 귀로 들은 것에는 믿음이 크지 않았다. 그 동안 들은 이야기에 수없이 많이 속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각 이외의 감각을 통해 인지하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관념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됨으로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생활 습관으로 고착되어 하나의 문화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시각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시각은 믿을 수 있는 감각 기관이라고 강요받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도 오관 중에서 시각만이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관의 경중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누구도 시각만이 더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면서 시나브로 그렇게 되어져버렸다. 상대적으로 시각이 중요하다는 점이 생활의 습관으로 굳어져버렸다. 눈으로 본 것은 의심도 없이 믿어버리게 되었다.

시각만이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높다는 것은 과학적인 측면에서 검증되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사람의 후각도 원래는 개의 후각 못지 않게 훌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것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그 기능이 약해져버린 것뿐이다. 청각도 그렇고 미각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오관이 모두 다 훌륭한 감각 기관이었다.

삶이 시각 의존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실제로 눈은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신하고 있다. 신뢰성이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가장 많이 속이고 있는 감각 기관은 다름 아닌 눈이다. 보는 것은 100% 믿고 있는 점을 거꾸로 이용하여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착시다. 도로에 놓여 있는 새끼줄을 우리는 뱀이라고 인식하고 화들짝 놀란다. 정신을 수습하고 자세히 살펴보아 그 것이 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의 상실감은 크다. 그래도 우리는 눈을 탓하지 않는다. 눈은 정확하게 새끼줄을 보았는데, 그 것을 인식한 뇌에서 잘못 판단하였다고 생각한다. 눈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할 수가 없다.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도 그렇게 생각하고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운 모습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취하여 다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눈의 배신은 조금도 문제삼지 않는다. 눈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뢰한다.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이고 있는 것이 바로 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눈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준다. 그 것도 모자라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그 것뿐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할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하여도 분명한 잘못이라고 인식을 하면서도 자신이 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그런 실수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해야 한다고 쉽게 생각한다. 만약 그런 실수를 다른 사람이 하였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아니 가혹한 책임을 주저하지 않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가장 사랑하는 자신이 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신이 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는 태도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면 해질수록 더욱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안이한 태도로 자신을 용서하게 되면, 당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모른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눈이 우리를 가장 많이 속이는 것처럼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이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절대적인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존재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성찰을 조금만 하게 되면 알 수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가을에 취하여 나를 잊어버리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물론 가을은 아름답다. 그러나 가을에 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가장 신뢰하는 눈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가을을 즐기면 된다. 가을에 도취되어 나 자신까지 흔들리게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가을을 통해 살아 있음을 누려야지 가을에 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아의 경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이기 때문에 무조건 관대해서는 그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무너지게 하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정체성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자아는 결국 바람과 같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향기 나는 사람. 향기 나는 사람은 정다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가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고 맑은 울림이 있는 사람이다. 울림이 여운으로 남아 사람들 영혼에 공명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주변에 향기 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덕분에 행복해질 수 있다.

강아지풀

영글어가고 있는 강아지풀이 마음에 들어온다. 휘어진 모습이 멋스럽다. 복잡하고 힘든 일상사는 잠시 뒤로 밀쳐두게 한다. 무거운 짐이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게 한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도 한 평생이고 누리면서 즐겁게 살아도 한 평생이 아닌가? 주어진 인생, 즐기면서 살라고 한다.



가을의 선물.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런 가치도 느낄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이 있는 잡초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마음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오묘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분명 가을의 선물이다. 가을이 가져왔기에 가슴 설렐 수 있다. 남서풍을 따라 찾아온 선물이기에 더욱 더 향기롭다.

맑은 하늘을 가르며 흔들리고 있는 강아지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풀이지만, 옥정호 부근이어서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수의 물과 어우러져 있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과 어우러진 산과 호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치가 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아지풀의 멋진 모습에 감탄하면서 깨닫는 것이 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발버둥을 치고 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런 모든 일들이 좀 더 사람답게 하는 일이라고 믿고 행동해왔다. 나 자신을 위하고 나아가서 가족을 위하는 일이며 국가와 사회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 것은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등바등하면서 해온 일들은 사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다. 욕심이란 수렁과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러니 개미 쳇바퀴 돌듯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강아지풀은 그 것을 말하고 있다. 죽는 줄도 모르고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방이었을 뿐이다.

흔들리고 있는 강아지풀을 통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기술이란 무엇일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만드는 기술은 무엇일까? 바라만 보아도 은은한 향이 배어날 수 있는 기술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사랑하는 기술이고 사랑받는 기술일 것이다. 강아지풀은 사랑받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할 수 있는 기술을 먼저 습득해야 한다. 사랑하는 기술은 간단하다.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는 `……때문에`라는 말을 앞세우지 않으면 된다.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기술의 핵심이다.



오직 `……덕분에`라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긍정적인 성품을 가지는 것이다. `가을 덕분에 강아지풀의 멋을 알 수 있었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가을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기술은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사랑할 수 있다.

강아지풀의 낭만을 통해 주변을 둘러본다. 호수가 그렇게 정겨울 수 없다. 하늘이 그렇게 높아져 있을 수 없다.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 얼마나 좋은가.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가을의 선물에 감사한다. 살아 있음이 그렇게 고맙고 즐거울 수가 없다. 아! 정녕 가을이다.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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