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역사 1 - 조선 시대




# 조선의 왕들은 청계천 정비 사업에 직접 나와 격려하곤 했다.


조선 시대 개국 이후 비가 많이 올 때마다 범람하는 청계천 문제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대규모 정비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역대왕들 중 가장 힘이 셌던 군주들뿐이었다. 조선 전기의 태종과 세종, 후기의 영조와 정조 만이 청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백성을 대대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청계천 개조에 나선 태종은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해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했다. 당시 도성 인구가 8만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태종은 이 때 주요 하천의 양쪽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됐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441년(세종 23)엔 마전교 서쪽 물속에 표석을 세워 수위를 측정했는데 이는 홍수 예방에 큰 도움이 됐다.

세종은 또 도시하천으로써의 하수도 역할에 비중을 둬 이후 청계천의 역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생활하천으로 청계천의 비중은 18세기 영조가 나타날때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왔다.

세종 이후 350여년간 큰 변화 없던 청계천에 정비의 필요성이 커진 건 도성의 인구가 급속히 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조선 전기의 10만명 안팎 인구가 임진왜란을 통해 유민들이 늘어나면서 17세기 말 20만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했다.

조선 전기의 청계천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생활쓰레기와 하수가 몰려들었고 이는 영조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이에 영조는 1759년((영조 35) 10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를 설치하고 이듬해인 1760년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농한기인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진행된 57일간의 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한성부민 15만명, 고용인력 5만명 등 20여만명으로 당시 도성인구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당시 투입된 쌀 만 2300여석이었다고 한다.

준천사업으로는 불안했던지 영조는 1773년 이전 공사에서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하지 못했던 개천 양쪽을 석축으로 쌓는 공사를 실시하고 버드나무를 심어 제방을 방어토록 했다. 이는 이후 청계천의 기본 골격으로 오랫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정조는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영조의 준천 사업을 잘 마무리했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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