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한가운데서

옹기와 그리움

옹기들이 정겹다. 다양한 크기의 옹기가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이색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라면 의도는 분명 성공했다. 달리는 자동차를 멈추게 할 정도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전북 전주에서 진안으로 들어가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집. 옹기로 꾸며진 이 집은 깊어가는 가을의 한 가운데를 멋지게 수놓고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낭만에 대한 욕구가 넘쳐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무어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흥이 일어난다.



옹기. 서민들의 그릇이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살림 도구다. 물건을 보관하고 관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다. 그래서 서민들의 삶이 배어 있는 물건이다. 특정한 집에서만 사용하는 생활용품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살림살이이다. 사람들의 애환이 듬뿍 쌓여 있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옹기가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졌다. 플라스틱이 출현하면서부터 옹기의 사용이 뜸해진 것이다. 편리성에 밀려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급기야 옹기들을 모아놓고 관리하던 장독대마저 사라졌다. 시나브로 멀어진 장독대와 함께 옹기는 우리들의 삶에서 멀어진 것이다.

옹기가 서민들의 생활도구였다면 자기는 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다. 투박한 옹기에 비해 자기는 그 느낌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고급스럽고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 단순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서민에게 있어서 자기는 그림의 떡과 같았다. 실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옹기였다.

옹기는 숨쉬는 항아리다. 그 과학적 원리가 확인되니, 옹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치 냉장고도 바로 이런 옹기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하니, 옹기를 만든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옹기이기에 더욱 더 정감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옹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향이 떠오른다.



옹기와 고향. 그리움의 대상이다. 살기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면 의지하고 싶어진다. 의지처가 되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애틋한 마음이 아롱아롱 모아져 쌓인 것이 바로 그리움이다. 옹기를 보니, 고향이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사랑이 절실해진다. 평생을 장독대의 옹기를 닦으면서 살다 가신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진다.

억새와 계영배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가 참 곱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무심한 세월이 야속하다. 가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싶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이런 마음을 모르는가 보다. 그저 가을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다. 파란 하늘을 즐기며 맑은 가을에 푹 젖어 있다. 아무 걱정 없는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시리게 한다.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들녘에 서 있는 억새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알알이 영글은 낱알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풍년이 든 들판에는 넉넉함이 넘쳐난다. 황금빛 낱알과 은빛 억새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가을 들판이 그렇게 빛나 보일 수 없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들녘에 풍년이 들면 만사형통이라고 했다. 예전의 일이다. 그때는 풍년이 들면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농민은 어떠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풍년이 들었으면 제일 좋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농민이다. 1년내 땀 흘려 열심히 일한 대가가 풍년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면서 환희에 차 있어야 맞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하다.

풍년이 들었음에도 쌀값이 떨어지고 있으니, 농민들의 심정은 죽을 맛이다. 이는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감하다. 농업이 더 이상 천하지대본일 수 없게 된 건 오래전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풍년이 들었으니 즐거워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쌀값 걱정으로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게 현실이다.



술잔에 70%의 술이 차면 나머지는 밖으로 흘러내리게 만든 잔을 계영배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지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배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삼가야 할 것이 어찌 술뿐이겠는가? 술은 말할 것도 없고 삼가고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태 속에서 신중을 기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계영배는 그 의미가 크다.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를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황금 들녘을 바라보면서 농민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가을이 가고 나면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계영배가 떠오르는 이유다.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억새를 통해 가을을 보면서 겨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애타는 농민들의 마음을 나 몰라라 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는 혼자는 살아갈 수 없다. 계영배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면서 삼가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은빛 억새에 빛나는 가을만을 보지말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버섯나무

버섯이 나무를 점령하였다. 나무는 버섯나무가 되었다. 밑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무의 끝까지 버섯이 자라고 있다. 언뜻 보기에 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처음부터 버섯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버섯의 왕성한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만난 버섯나무는 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실감케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 할지라도 저리도 오묘하게 만들 수는 없다. 자연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생명력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는 생명을 다하였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 바로 버섯 균이다. 나무를 생명의 터전으로 여기고 그 곳에 새로운 세상을 펼쳐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어찌 한 두 가지뿐이었겠는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섯나무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생각한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다보면 아스라하다. 숱한 고비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좌절을 맛보아야 하였다. 그것을 극복하기도 하였고 그냥 우회하여 지나치기도 하였다.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온 느낌이다. 어찌 그 험한 길을 걸어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겪어야 하였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갈등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주의하고 세심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잘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들. 실패하게 되면 그 결과로 인해 겪어야 하는 절망감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온 몸에 엄습해 들어오는 아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어디 그 뿐인가? 갑작스럽게 야기되는 재난의 고통도 크기만 하였다. 거기에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서 아프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고통 또한 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은 바로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음을 비우면 될 일이었다.



버섯나무를 바라보면서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행복이란 밖이 아닌 내 안에 숨어 있다.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헤맬 뿐이다. 삶의 철학을 정립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바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버섯나무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행복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라고.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