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매복 작전으로 왜군에 대승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불암산은 조선시대 무신인 고원백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대승을 거둔 `노원평 전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임란 당시 양주목사를 지낸 고원백이 노원지역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593년 3월 25일에서 27일까지 3일간 이어진 `노원평 전투`다. 당시 고언백은 승장 사명대사군과 합세하여 가등청정의 선봉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화살을 맞은 왜적의 수가 행주대첩의 피해에 못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전해지지만 지금은 현지 주민들도 이를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원평 전투는 노원구를 중심으로 의정부 입구에서부터 중랑천의 한강 합류 지점까지의 마들평야를 무대로 펼쳐졌는데 중심은 불암산 이었다.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 패한 왜군 5만은 한성에 집결했는데 식량과 보급품을 구하기 위해 양주 지역으로 대규모 수송작전을 벌였다. 이런 첩보를 입수한 고언백 등은 관군 2000명과 의병, 승병 등 군사 3000명을 매복시켜 수많은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고 한다.

불암산성이 근거지였지만 노원평야 우관동(우이동) 누원(호원동) 두협천(중랑천 상류 주변) 등 곳곳에서 매복해 왜군을 섬멸했다. 노원평 전투의 승리는 왜군을 한양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가 됐고 인근 왕릉인 태릉과 강릉이 보호받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선조실록>엔 고언백과 관련 "궁마를 잘 다루고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분격했다. 그 공으로 양주목사 겸 경기도 방어사가 됐는데 진을 쳐서 싸우는 것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것에 잘 했다. 사졸보다 앞서 싸웠으며 그가 쏜 화살은 적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적들이 매우 두려워했다"고 적혀 있다. 임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도 <징비록>에서 "고언백은 용력이 있고 싸움에 익숙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전공을 인정바든 고언백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역모사건에 연루돼 곤장형으로 죽었다. 후에 선무공신으로 복권됐고 병조판서로 추증됐다.

고언백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수락산 중턱에서 생활했던 매월당 김시습 등과 함께 노원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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