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폐인 이야기

컴컴한 방이 모니터 불빛으로 푸르스름하게 그 윤곽만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마치 방안의 다른 가구들처럼 큰 움직임 없이 모니터를 마주한 한 남자. 책상 위에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빠른 손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치워진 과자 봉지며 컵라면 용기…. 그 뒤로 단정하게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피규어 인형들. 그 인형들의 웃고 있는 눈이 바라보는 곳에 남자는 불어버린 몸과 두터운 안경, 그리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모니터에서 움직이는 화상은 책상위의 바로 그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니터에 최대한 가까이 앉아 약간은 구부정한 자세로 모니터 속 그녀에게 중얼중얼 뭐라 말을 건네는 남자.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였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단어인 ‘오타쿠’, 일본말로 무언가에 깊게 빠져있는 폐인들을 말하는 단어로, 이것이 인터넷 상에서 ‘오덕후’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아이돌스타 등에 마니아급 이상으로 몰두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의 숫자도 많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해 인터넷상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어 이제는 오덕후들에 대해 ‘취향이니 존중해주자’는 의견이 늘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도 TV 버라이어티쇼 중 하나인 ‘무한도전’의 팬이요, ‘소녀시대’의 미끈한 군무를 보며 반사적으로 채널이 고정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보통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만을 가지고 지탄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이러한 것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고 그에 집중하는 모습은 어쩌면 용기 있는 일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니아급’ 이상으로 뭔가에 빠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이상하다. 괴이하고, 가끔씩은 무서울 때도 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보면서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그들이 오덕후라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 눈엔 그저 어린애들을 위한 장난감 같이 보이는 피규어 인형을 몇 십만 원씩 주고 사서, 그것도 하나도 아닌 여러 개를 진열해놓는 거라든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시간 이외에 자신의 일상생활은 거의 없다시피 한 모습 등을 보면서 ‘대체 왜 저럴까’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이 전부다.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요, 내 시간 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 스스로 그들이 좋아서 그들의 돈과 시간을 투자할 뿐인 것이다.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닐뿐더러 내 참견이 오히려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얼마전 모 케이블방송에 ‘십덕후’가 소개된 적이 있다. 십덕후란 오덕후보다 더한 오타쿠라는 뜻으로 ‘오(5)덕후+오덕후=십(10)덕후’라는 것이다.

이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 지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현재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저 재미있는 사람이다,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그가 꽤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사랑의 말을 나눌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그려진 쿠션과 함께 데이트도 하고, 훗날에는 결혼도 하고 싶다는 그는 이제 겨우 이십대 초반이다. 캐릭터와의 사랑을 널리 알리고 싶어 방송에 나왔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가 진지한 만큼, 그를 보는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송이 끝나고, 예상대로 인터넷은 그에 대한 논란으로 뜨거워져 있었다. 방송 중간에 나온 동생과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하소연한 내용 -집에서는 모르겠는데 밖에서도 그러고 다니니까 친구들이 오빠를 변태인 줄 안다-에 대해 취향을 넘어서서 방송까지 출연해서 자신을 십덕후로 소개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폐가 되는 일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십덕후 여동생’이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오빠로 인해 본인이 원치 않게 주목을 받게 되어버렸다.

방송 출연 전에 그가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이나 동영상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중에는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도 도를 넘어서는 것들도 있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사실 그가 욕을 먹는 것에 대해서 그를 옹호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과거에 올린 블로그 자료 중 비위가 상할 정도로 몰상식한 사진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안쓰럽던 마음도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사진을 올릴 생각을 했다는 것도 경악스러운데 그 사진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도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그의 잘못된, 비상식적인 행태가 미디어를 통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끼칠 피해다. 그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는 괴인 취급을 받게 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 이상한 십덕후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주목을 받게 되어버린 가족들의 고통은? 그는 과연 이런 것들을 책임 질 수 있을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정도를 지킬 필요가 있다. 현실과 가상을 혼동할 정도로 무언가에 빠져버리는 것도 옳지 못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리는 것이다. 취향이 존중되는 것은 자유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방송출연 후 그가 블로그에 남긴 글에서는 일말의 반성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자극적으로 편집 구성해 방송해버린 미디어나, 그의 가족들의 신상정보를 파헤쳐 웹상에 공개해버린 네티즌, 오타쿠는 다 죽여 버려야 된다며 논리도 없는 비난으로 죄 없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목소리들. 그건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의 책임이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재미로 남을 다치게 하는 일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빠져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의 잘못된 생각 보다 더 질 나쁜 것일 수도 있다고, 난 생각한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