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두 개의 이야기

이야기 하나: 선입견

오른쪽 이마부터 뺨을 지르는 큰 흉터가 있는 사내가, 그 흉터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인상으로 무언가 한 손에 묵직한 자루 하나 짊어 메고 할머니 홀로 사시는 외딴 집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큰일이 나기 전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하지만 알고 봤더니 그는 사실 강도가 아니라 할머니의 하나뿐인 말동무이자, 행여 쌀독에 쌀은 떨어졌는지 매일 같이 들러 살펴드리는 심성 고운 사내였다. 이 이야기는 어릴 때 ‘어린이를 위한 명심보감’의 일부이다. 비록 만화로 되어있고 명심보감의 모든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었지만, 위와 같이 보석 같은 내용이 많이 담겨 있던 책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허름한 노부부가 총장을 만나고 싶다며 하버드대학을 찾아왔다. 수위는 그들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며 총장을 만나고 싶다는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결국 그 노부부는 총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사실, 그 노부부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으로 하버드 대학을 찾은 것이었고 이들은 모욕적인 대우로 기부할 생각을 버리고 대신 재단을 설립해 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이 대학이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한다. 후에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글귀가 붙게 되었다고.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시각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정말 당연하고도 무서운 사실이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 자체를 망각하여 버린다는 점이 특히 무섭다. ‘DIALOGUE IN THE DARK어둠속의 대화)’라는 체험전시에 다녀온 적이 있다. 시각을 배제하고 맞이하는 세상은 나에게 낯설고 또 어려운 공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시각에 많이 의존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준 경험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지금껏 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선입견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先入見, 괜히 선입견에 見자를 쓰는 게 아닐지 모른다. 그만큼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첫인상은 선입견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눈으로는 본질을 보기 힘들다. 선입견이 한번 형성되고 나면, 후에 그를 바로잡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본질은 편견에 쉬이 가려진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현자들이 선입견을 경계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마음먹는다고 그리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지 않으리라 결심한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범인들에게 너무나 어려운 경지이다.

어려운 것은 그 뿐이 아니다. 선입견이 교묘하게 진짜인체 하고 있다면, 이건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안목’은 사실 하나만 보고 열을 판단해버리는 선입견과 한끝 차이지 않나. 나는 도무지 이 둘을 구분해 낼 자신이 없었다. 얼마 전 도서관 입구에서 어떤 남자분이 대여한 책을 둥글게 말아 한 손에 쥐고 나머지 한 손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터덜터덜 걸어가시는 걸 보게 되었다. 난 그분의 그런 태도를 보고 단박에 ‘좋지 못한 부류’라고 판단했다. 빌린 책을 저렇게 막 다루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일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선입견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혜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확신이 안 선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일부로 그의 전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옷차림, 그의 얼굴 생김새, 때로는 그의 거동을 통해서도 그를 말할 수 없다. 이런 겉모습은 다만 밖으로 보이는 껍데기일 뿐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를 정의한다면, 과연 그것이 그일지 의심 할 수밖에 없다. 체격이 조그맣고 얼굴이 잘 빨개지는, 수줍은 많은 소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목소리도 체격만큼 조그마해서, 나와 단 둘이 있을 때가 아니면 그 아이와 제대로 대화를 하기가 힘들었다. 시선조차 발끝을 보고 있던 그 아이는, 소극적인 아이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품고 있는 꿈은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자신을 최고의 대통령상으로 꼽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 소극적이라고 포부조차 작은 것은 아니구나, 날 놀랍게 했던 아이였다.

하나에서 열을 관통하는 근간을 파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안목’이다. 빌린 책을 험하게 다룬다고 그 사람이 되먹지 못한 사람이라는 건 비약이다. 다만, 그런 작은 행동을 통해서 공공시설을 사용할 때 남을 크게 배려하지 못 하는 사람이란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 사람이 그러한 작은 것까지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안목’이라면 그가 되먹지 못한 부류라고 말하는 것은 ‘선입견’인 것이다. 그도 좋은 선배이자 좋은 후배, 좋은 친구, 좋은 아들일지 모른다.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현명하게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볼 때 ‘보이는 것’으로 단정 짓지 않도록 신경써야한다. 또한, 내가 보여지는 입장에 있을 때에도 신중을 기해야한다. 작은 거동 하나에서 누군가는 당신을 ‘되먹지 못한 부류’로 낙인찍어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안팎으로 모두 신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들도 조금씩 사라지지 않을까.

이야기 둘: 빨간 여자

길거리에 가득한 햇살에 사람들이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같다. 바쁜 걸음을 옮기던 행인들도 벚꽃 흩날리는 장관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이고 만다. 확실히 봄은 봄인가 보다. 한층 가벼워진 옷들이 색색 깔의 꽃들과 앞 다투어 그 화려함을 뽐낸다.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고운 봄날이다. 노란색, 분홍색, 빨간색, 초록색… 알록달록 꽃보다 고운 옷들 사이로 단연코 튀는 한 여성분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대략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그녀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이며, 손에 깡총하니 들려있는 작은 백과 약간은 짧은 기장의 원피스, 그 아래로 보이는 스타킹까지 온통 붉었다. 반짝이는 검은 하이힐과 선글라스를 제외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 물감에 퐁당 빠졌다 나온 것처럼 붉었다. 햇살을 받아 그녀는 마치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걸음걸음 붉은 물이 새어나와 보도블록을 물들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게만 그녀의 모습이 쇼크로 다가온 것이 아닌 모양이다.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꽂혀 떨어지질 않는다. 앞서가는 남성분도 연신 뒤를 돌아본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대번에 인상을 팍! 쓰시더니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그녀의 구두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멀어져 그저 붉은 형상이 되었다가 마침내 자취를 감출 때까지 난 그녀를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하철역에서 홀연 나타나 그리 길지 않은 인도를 따라 걸어 코너를 끼고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실제론 몇 분 되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그 시간이 몇 십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내 커진 두 눈을 비롯한 수많은 시선들이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그녀에게 꽂혔다. 대개는 경악, 몇몇은 조롱, 몇몇은 감탄. 연예인 못지않은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 그녀의 대담성에 그녀가 사라진 코너를 한참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렇게 대담한 패션을 구사하는 그녀의 생각, 사상, 가치관을 범인인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의복은 사람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옷을 착용하는가는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내가 자라온 환경, 현재 나의 입지와 신념, 닮고자 하는 모델, 온갖 것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고 돈을 지불하는 그 단순한 행동이 사실 이 모든 요소를 따지는 복잡한 과정인 셈이다. 아무리 옷에 신경을 덜 쓰는 사람이라도 옷의 형태나 색깔, 유행, 자신의 기호 등을 전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실용성만으로 옷을 고른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옷은 ‘말을 한다’. 타인에게, 그것도 나를 볼 수 있는 다수의 불특정다수에게 나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입는 옷이 남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도록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혹시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서양에서는 남들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자아 표출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동양권에서는 남과 지나치게 다른 모습을 공동체에 대한 도전이나 반발, 혹은 와해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동양권 문화적 경향의 연장선상으로 남과 달리 눈에 띄는 외향이나 행동을 지양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남들과 다르다’가 가지는 의미가 서구 사회보다 한국 사회에서 더욱 큰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성’은 능력보다 더 중히 평가되기도 하는 요소다. 조화롭게 융화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못 쓸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평범한’ 범위를 크게 이탈해 버리는 외모는 사회성의 결여라는 인식하에 그런 외모를 지탄하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만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바탕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적인 사상을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 공동체가 단순히 개개인의 집합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1+1>2)은 동양 문화권이 가지는 힘이다. 하지만, 이것이 개성을 말살과 천편일률적인 자아를 양산하는 폐단을 양상하게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성을 표현하는 것은 조화롭게 공동체에 녹아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너도 나도 미디어속의 유명 인사들이 입은 그대로 카피한 듯 입고 다니는 요즘에는, 그러한 개성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하다. ‘겨우’ 옷에 불과한 일인데 너무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옷 ‘조차’ 개성이 없는 현실에서 과연 발전적인 상황을 낙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자신의 옷을 고를 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조금만 덜 신경 쓸 수 있게 된다면, 분명 머지않아 유행이 아닌 개성을 표현하는 의복 문화가 자리 잡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의복으로 시작해서 개개인의 자아가 마치 각기 다른 꽃처럼 풍성하게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당장 우리부터, 남들의 개성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거두어야 한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자. 너무 과해서 악 소리 나는 정도가 아니라면, 이것이 그의 개성이구나, 하고 넘길 수 있게.

빨간 옷의, 빨간 그녀도 그녀의 빨간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 것뿐이다. 그녀는 남들의 시선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선택한 옷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장례식장의 노란 티셔츠처럼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봄 마실에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좀 입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혀를 차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녀의 용감한 개성에 박수!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