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무례한 손님들

사립문에 걸어둔 우편함에 새들이 집을 짓는가 싶더니 알을 낳았다. 우체부 아저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주의해줄 것을 당부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그 뒤로 아저씨는 나보다도 더 많이 배려를 하고 있었다. 우편물을 우편함에 넣지 않고 그 아래쪽으로 조심해서 놓아두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아예 현관에까지 와서 내려놓고 갔다.


#편지함

그렇게 애지중지 보호해 온 새알을 서울에서 왔다는 무슨 산악회 사람들이 죄다 꺼내가 버렸다.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마당에 아직 산악회 명찰을 단 남녀 서넛이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마당에 흰 민들레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서 그것을 캐던 중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냐고 소리를 질렀더니 돈을 꺼내며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이것은 이중의 무례가 아닌가? 그제야 그들은 사과를 했다.


#우편함 안에 새집이 있다

그들이 나간 뒤에 보니 새들이 오동나무에서 이리 뛰고 저리 날며 울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아 이런, 당했구나,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우편함을 열어보았다. 역시 없었다. 알을 모두 꺼내가 버렸다. 처음에는 뱀의 소행일까 싶기도 했지만 뱀이 기어오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산악회 사람들 짓이 분명했다. 화가 나서 달려갔더니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 당신들 외에 다녀간 사람이 없는데 거짓말까지 하느냐고 비웃는 투로 말했더니 비로소 인정을 했다. 그리고는 또 돈을 내놓았다.

그 옆의 몇몇 사람들은 뭐 그딴 일로 화를 내고 지랄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구석 저 골목에서 산악회 명찰을 단 사람들이 몰려나오는데 그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인구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마을을 관광버스 한 대가 풀어놓은 사람들이 장악하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나물을 채집하는 중이었다.


#불청객들

돈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사회를 산다는 것은 슬프다. 그런 슬픔을 피하고자 시골로 왔는데 이번에는 도시가 슬픔을 간직한 채로 나를 따라온 형국이었다. 가끔 낯선 이들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런 무례하고 몰염치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랬다. 내가 도시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이라는 것을 어디서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이런 손님들은 대부분 귀농 혹은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고, 그래서인지 가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반드시 물어보곤 했다. 이 집을 얼마에 샀느냐. 땅값은 얼마였고 집값은 또 얼마였으며 깎았느냐 안 깎았느냐 등등.


#우리집 대청 천장

그때마다 별 생각 없이 다 말해주었다. 집은 비워둔 지가 오래여서 주인이 아예 집으로 치지를 않았다고, 그래서 집값은 계산에 넣지 않고 땅값만 치른 것이라고, 땅값도 508평에서 8평은 원단위 절사하는 식으로 주인이 먼저 계산에서 빼 주었다고, 등등 빼지도 보태지도 않고 있었던 그대로를 다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구옥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다 말해주었다. 원래의 생각은 구옥을 헐어내고 흙이나 통나무 같은 것으로 새로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안에 대청이 있었고, 사용한 재목들이 절집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커다랗고 생김새도 매끄럽게 휘어있는 등 보기에 좋아서 헐어내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수리, 보완한 뒤에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는 얘기까지, 마치 옷을 벗고 내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듯이 죄다 털어놓았다.


#슬레이트 지붕

그러면 이윽고 반응이 나오는데 그것이 저마다 각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야아, 완전히 공짜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생각보다 비싸군요” 하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싸지도 않고 비싸지도 않고 아주 적절하다고 보는 게 옳지요.”

“아, 주변 시세가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주변 시세를 알아보지는 않았으니까요. 가격의 산출 근거는 외부가 아닌 내부 즉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지 않을까요? 구하고자 하는 사람 마음에 썩 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얼마를 치렀든 싼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닌, 아주 적절한 가격이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무도 오래 세월 동안 ‘나’를 살면서도 내가 아닌 타인을, 외부를 지향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직 주체가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증거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샀는데도 나중에 누군가 자기보다 싸게 샀다고 하면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속상해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주체는 결국 돈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이 돈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인간은 한 번도 돈의 관리자가 되어본 적이 없다. 돈의 관리를 받을 뿐이다. 돈이 인간을 관리하는 방식은 너무도 은밀하고 전방위적이어서 인간은 결코 돈의 권력을, 그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망했으면서도 왜, 무엇 때문에 망해야 했는지를 잘 모른다. 그래서 학자들은 거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뭔가 대단한 것 같아서 잡았는데, 잡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없어져 버리는 거품.

다시 집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를 찾아와서 이것저것 묻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매우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현재 슬레이트로 되어 있는 지붕을 걷어내고, 마루도 뜯어내고, 지붕에는 색깔이 아름다운 지붕재를 붙이고 앞에는 통유리를 대고, 선라이트 고급제품으로 차양을 해서 별장으로 시장에 내놓는다면 구입한 가격의 최고 열 배는 받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였다.

도시를 떠나 시골살림을 살아보겠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즉석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뭐랄까, 귀농 혹은 귀촌을 삶의 질적인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투자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귀농 혹은 귀촌을 해서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흙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아주 오래된 잠언이 있기도 하지만, 흙 자신을 속이려 드는 사람에게까지 흙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내주지는 않는다.


#우리집 마당의 튤립

시골 생활에 실패하고 떠나는 사람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다. 몇천 혹은 몇억 원씩 그야말로 투자를 해서 땅을 파헤치고 집을 짓고 거창하게 살림을 시작하지만, 흙과의 친밀감을 갖지 못한 채로 일만 벌인 그 일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실망하고 떠나고자 집을 내놓지만, 자기가 들인 돈의 절반도 회수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품에 현혹되었다가 자기 자신이 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집 마당의 튤립

아무튼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그런 반복되는 질문을 받는 동안에 나는 비로소 알았다. 내가 왜 그토록 도시를 떠나고자 했는지를 명료하게 알았다. 돈으로 돈을 버는 사회구조 속에서 점차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이 가련하고 안타까웠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인가에 의해 사육되고 있다는 느낌, 그런 불안을 감내하기 어려워서 도시탈출을 도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도시에 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막연하게 느꼈을 뿐이지만, 시골에 와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도시를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인식을 갖게 되면서 나는 튤립을 길러보기로 했다. 튤립을 마당 한쪽에 가득 심어놓고 몇 년 동안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자본에 대한 뭔가 구체적인 답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튤립이야말로 돈으로 돈을 벌고 그 돈 때문에 망해서 거품이나 손에 쥐는 자본의 아주 극단적인 모순의 전범이요 출발점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튤립 한 송이를 집 한 채 값도 넘는 돈으로 거래를 하는 등 극도로 방만한 경제운영을 하다가 끝내 국가부도 사태로까지 치달았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그 당시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문득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류 최초로 증권회사를 개설하고, 오늘날의 다국적기업 격인 동인도회사를 만드는 등으로 자본주의체제의 기틀을 확립한 네덜란드의 막대한 부는 그들 자신이 노동을 해서 번 돈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돈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민족이나 국가를 찾아다니며 그들을 총칼로 위협해서 식민지배하고 그들의 것을 착취, 약탈해서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결과물일 뿐이었다.



자본의 역사는 결국 식민의 역사이고 착취의 역사이다. 이러한 뿌리를 갖고 있는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도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선하고자 해도, 자본은 결코 나를 선하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우편함 속의 새 알을 꺼내다가 깨서 먹은 뒤에 돈으로 값을 치르려 했던 사람도 그 사람 바탕이 탐욕스럽거나 잔인해서는 아닐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진 무의식이 그렇게 시켰을 뿐.


#흰민들레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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