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전쟁놀이 그리고…

뭔가 답답하고 한심하고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을 때 손톱 발톱을 깎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세상이 날로 좁아지고 뒤틀어지고 야비해진다 싶을 때도 손톱 발톱을 깎고 있노라면 뭔가 툭 시원하게 터진다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그런 일이 많아서 손톱 발톱이 남아나지를 않는다. 전쟁놀이로 한몫 잡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문이 산골에도 이미 퍼져 있는 까닭이다.

더 이상은 깎을 수도 없는 손톱 발톱을 무연히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코딱지만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난 내 자신이 처량하다. 그렇다고 이 나라의 국민 안 한다고 골방에 처박혀 이불 뒤집어쓰고 자빠져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괜한 하늘 보며 주먹질이나 해대는 것은 더더욱 못할 짓이다. 아아, 이럴 때는 길을 나서야 한다.

시골살이의 가장 큰 자랑은 뭔가 일을 하다 말고 답답하거나 혹은 마음이 설렁거릴 때 주눅 들지 않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훌쩍 길을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호미도, 삽도 낫도 다 일하던 자리에 방치한 채로 누구 오라는 사람도 없건만 급하게 가야 할 곳이라도 있는 듯 서둘러 길을 나선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갈 곳이 없을까. 목적한 곳도 없이 길을 나서긴 했지만 가다 보면 가야 할 곳은, 가볼 만한 곳은 저절로 생각나기 마련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믿음조차 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길을 나선다.



어떤 날은 토끼몰이라도 나가듯이 잰걸음으로 걷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다리가 부러지도록 페달을 밟기도 하지만, 세상이 참 작고 옹졸하구나 싶은 요즘에는 주로 2인승 미니밴을 몰고 나선다. 보다 멀리, 보다 깊이 생각을 좀 해보고 싶은 까닭이다.

가다 보니 어느새 염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폐염전이다. 아주 오래된 다리 하나가 고랑창 위에서 썩어간다. 목재가 소금에 절여진 까닭에 금방 썩지도 않고 남아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다리의 수명은 적게 잡아도 50년은 될 것이라고, 길에서 만난 할머니께서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등에 망태를 메고 마늘밭을 가시는 중이란다. 이 망태는 고창에서도 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바다에서 게도 잡고 조개도 잡을 때 쓰던 것이다. 요즘은 조개잡이도 경운기를 타고 들어가기 때문에 망태를 쓰지 않는다. 바다에서 쓰지 않는 망태를 이제 밭에서 쓰는 것이다.



심원면 만돌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고 지금까지 사셨다는 할머니로부터 옛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유혹을 애써 밀어낸 채 만돌벌로 향한다. 염전을 운영하기 전에는 바다였고 그래서 섬이었다는, 6,25때는 양민 학살의 현장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커다란 무덤 모양의 동산이 군데군데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떠 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 여행 혹은 산책의 묘미라는 고전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고창의 심원면 만돌에서 해리면 동호를 거쳐 상하면 구시포에 이르는 총연장 15킬로미터의 이 코스만큼 다양한 볼거리와 느낄거리 그리고 생각거리를 주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만돌벌에는 동막이라 불리는 노란 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조개는 흙 속으로 3센티 이상 들어가지를 않기 때문에 세 살바기 아이들도 별 어려움 없이 잡아낸다. 맨발로 걷다가 발바닥에 오는 느낌이 저릿하다 싶을 때 그 자리를 파 보면 어김없이 조개가 나온다. 때문에 가만가만 걸어야 한다. 발에 힘을 주고 자발없이 뛰어다니면 조개가 와삭와삭 발바닥 밑에서 깨지는 참극을 겪게 된다. 바로 이러한 재미를 누리고자 주말이면 버스가 몇 대씩 들어오기도 하는데 주민들에게는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이 민폐를 어찌 극복할 것인가 궁리 끝에 만든 것이 갯벌체험학습장이다.



#전망대가 있는 편의시설

갯벌체험학습장으로 내려가는 둔덕에는 방풍림으로 심었던 아름드리 해송이 고풍스럽게 서 있고,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면 갈대가 무성한 폐염전이 동호 쪽으로 길게 펼쳐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뚝 끊어지면서 골프장이 나타난다. 폐염전 활용 방안을 모색하던 군에서 유치한 이 골프장 건설을 위해 야산 하나가 사라졌다. 광주와 정읍 그리고 고창에서 동원된 100대도 넘는 덤프트럭이 밤낮으로 6개월 동안 작업을 한 결과 야산이 하나 사라지고 염전 위에 올망졸망한 동산들이 몇 개 태어났는데 이것이 고창에서 두 번째로 운영을 시작한 골프장이다.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요 우공이산이었다.


#한때 섬이었던 전망동산

골프장의 현대식 펜스와 나란히 달리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늘어선 해송들 사이로 시원스레 뚫린 아스팔트 길을 달릴 때의 기분은 뭐라고나 할까. 과거와 현대의 조화 아니 문명과 야생의 공존현장을 체험한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골프장은 끝나고, 염전도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 한때는 ‘삼양염전’ 관리인들과 인부들로 북적거렸던 동호에 닿는데 여기에 유명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간척기념비


#골프장과 염전 사이길

고창의 서해안쪽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간척준공기념비를 가만히 서서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현대사 몇 장면이 휙휙 지나간다. 일제 치하에서는 중추원 참의 등 귀족으로서의 개인적인 이익사업을 펼쳤고, 해방 뒤에는 부통령으로서 일족의 안위를 견고하게 구축한 인촌 김성수와 그 아우 김연수 그리고 그 일족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그것이 바로 지금은 갈대숲으로 변한 삼양염전 그 어마어마한 땅인 것이다.


#동호해수욕장의 아름드리 해송

다소는 우울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 달리다 보면 동호해수욕장의 탁 트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 아래 나보다 높은 것 있으면 나와 보라는 듯 쭉쭉 뻗어 올라간 해송들이 장엄하다. 만돌의 해송이 백 살이나 되었다면 동호의 해송은 그 갑절 이백 살은 되어 보인다. 그야말로 아름드리, 어른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둥글게 감싸안으면 겨우 손이 잡히는 것들도 수두룩하다.


#동호해수욕장의 해당화

해송들 사이로 해당화를 심었다. 영광 백수 해안도로의 해당화에 자극을 받아서 심은 것들인데 이 해당화길이 상하의 구시포와 이어진다. 구시포에는 모래가 은빛처럼 아름답고 부드러운 명사십리가 있다. 모래밭이 십리라고 하는데 사실은 십리도 더 된다. 가끔은 작은 고래들이 죽은 채로 밀물에 밀려와 모래밭에서 썩어가기도 하는 이 모래밭의 명물은 아무래도 갈매기와 도요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부터는 이 명사십리 앞 갯벌에도 조개들이 서식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만돌의 갯벌체험학습장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조개잡이용 경운기


#초승달형 백사장


명사십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새로 개설한 펜션 단지와 전망대를 설치한 편의시설부근에도 해당화는 피었다. 해당화를 심은 지는 삼 년이 채 안 된다. 길이 뚫린 지는 사 년이 채 안 된다. 그 이전에는 어떻게 다녔을까? 멀리 우회해서 다녔다. 멀리 우회하기 전에는 아예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전망대


#폐허가 된 초소


작전지역이었다. 아니 군사지역이었다. 서해안으로 침투할지도 모르는 간첩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도처에 초소를 세우고 철조망을 치고 밤마다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간첩은 몇이었을까.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잡지 못할 간첩을 명분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국민의 삶에 막대한 불편을 초래하면서 세금만 썼다.


#구시포

그것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서서히 풀었다. 그렇게 십 년, 이제 거의 완전히 다 풀어지고 군데군데 녹슨 철조망과 흉물로 변한 초소들만이 우리에게 냉전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냉전시대는 과거형이다. 결코 현재진행형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는 전쟁놀이 준비에 한창이다. 이 준비가 정말로 전쟁놀이로 진입한다면, 우리는 다시 이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군인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갯벌체험학습장은 군사시설로 수용당할 것이고, 펜션 단지와 전망대가 있는 편의시설들은 군 지휘관들의 숙소나 작전사령부로 쓰이게 될 것이다.

서울에서 도모하고 있는 전쟁놀이에 대해 시골 사람들이 갖는 감정은 불안이 아니다. 슬픔이다. 악몽의 재현이다. 사변 당시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얼마였던가. 전북도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고창에서만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500여 명에 이르고 국군에 의한 학살은 그 세 배인 1400여 명에 달한다. 사돈네 팔촌까지 따지고 든다면 학살 피해와 무관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셈이다.

역사의 가르침만을 놓고 보자면 전쟁놀이의 당사자들은 절대로 피해를 보는 법이 없다. 한강교를 폭파하고 달아난 이승만 대통령이 그러했듯이, 전쟁놀이의 당사자들은 언제나 도망갈 길을 먼저 확보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항상 죽음을 필요로 한다. 누가 죽어줄 것인가. 전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꿈에서도 전쟁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서민들, 보통 국민들만 죽어나갈 뿐이다. 역사의 교훈이 이러한데 어찌 일이 손에 잡힐 것이며, 어찌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있으랴.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