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인동초

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꽃은 어떤 경우에나 성장이고 생산이고 완성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정한이 없는 한 도무지 눈물이 끼어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꽃은 특별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어떤 시절의 사건 사고들이 응축되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왜 이렇게 생겼을까. 좌우가 대칭이 아니라 기울어진 비대칭이다. 한쪽 날개에 상처를 입어 날지 못하는, 날아갈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에 의지해 하늘을 보며 호소하는 해오라기 같다. 그래, 호소다. 다만 호소일 뿐이다. 이 호소에는 원망이나 불평 같은 것이 없다. 때문에 그 향기는 달콤하고, 상큼하다.

달콤과 상큼을 동시에 갖는 향기는 많지 않다. 달콤한 것은 대개 느끼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단 것은 언제나 그렇다. 첫 맛은 달아서 좋지만 이내 끈적끈적해지고 그래서 얼른 손을 씻어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동에는 그런 것이 없다. 달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상쾌하다. 그래서 보고, 또 보게 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인돌 마을 매산에는 인동이 없었다. 전국 어디에서나 뿌리를 잘 내리고 꽃도 잘 피는 게 인동초라고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우리 마을에는 그것이 한 그루도 없었다. 그렇게 인동초의 실물을 못 보고 성장한 나는 훗날 인동초란 실존하는 식물이 아니라 고난 받는 정치인을 가리키는 관념 속의 식물로 파악하게 되었다. 봉황이나 용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존재 못지않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러다가 5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를 왔고, 그 해에 뒷산에 올랐다가 동충하초를 연상케 하는 기이한 꽃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면 작은 벌레 같은 동물들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것 같은, 조금 다가서서 보면 꽃 같은데 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뭔가가 영 이상한,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향기가 상쾌한 것이 꽃은 분명 꽃인데 여전히 꽃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모자란 것도 같고 넘치는 것도 같은 참으로 이상한 식물이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낯선 꽃을 한참 보고 있던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게 혹시 인동이 아닐까, 그러네, 인동이네, 맞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인동이라는 두 음절이 금방이라도 혀끝을 통해 밖으로 배출될 것 같은데 잘 안 되고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인동, 인동 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그랬다. 인동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에 알아보고 감격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으로 그것이 확실하게 인동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감격은 뭐라고나 할까,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이 온통 내 손 안에 들어왔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 꽃을 마당에서도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해 가을 한 포기 옮겨 심던 날 그리운 어떤 이가 생각났다. 아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그 꽃을 마당에서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신문에 실리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상으로만 보았던 그이의 실물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면하고 악수도 했던 날 그 밤에 나는 참 많이도 술을 퍼마셨고, 그리고 많이도 눈물을 흘렸었다. 보라매공원에서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알았어도 명료하게는 알 수 없었던, 그 불편한 몸이 그렇게도 심하게 불편한 줄을 그날 처음 알았다.



신대방역에서 전철을 내려 보라매공원까지 걸어갔었다. 자동차는 이미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인도를 꽉 메우고 차도로까지 내려서 걷고 있었다. 초여름, 아스팔트를 후끈 달궈놓은 뙤약볕이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벌써 목울대를 지나 가슴을 적시고 있었지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모세의 뒤를 따르던 민중들의 희망이, 열망이 어쩌면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이의 아들도 보았다. 그 또한 처음이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대면이었다. 악수를 하는데 아버지의 손만큼이나 크고 두툼했다. 그리고 아버지만큼이나 몸이 불편했다. 아니 아버지 이상으로 불편해서 혼자서는 잘 걷지도 못했다. 그때 이미 턱이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고, 말도 잘 안 나오고 있었다. 나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개인적인 실수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믿음이, 그 철학이 불손하다고 한밤중에 집을 습격해서 끌고 간, 끌고 가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전기로 지져서 사람을 치욕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몹쓸 인간들이 이 땅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몹쓸 인간들도 그이의 정신만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 그이의 몸은 비록 망가졌지만 정신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오히려 성성했다. 그렇게 그이는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그리고 평양으로 발길을 잡았다. 평양에서 형제간에 불화를 해서야 되겠느냐고, 조만간 한 집에서 같이 살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역사는 그것을 6.15공동선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로 10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몹쓸 인간들의 이기심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이는 그새 고인이 되어버렸고, ‘잃어버린 십 년’이라고 애통해 하던 이들은 대통령직을 접수하자마자 상황을 10년 전으로 되돌리는가 싶더니 한밤중에 어린 병사들을 동원해서 휴전선 전역에 선전용 확성기 따위나 설치하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세금을 써가면서 해댄다.

대통령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도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체험학습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학습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그이를 말할 때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또 한 사람의 대통령, 그는 중학교 때부터의 꿈이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는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통 ‘꿈은 이루어진다’ 식으로 해석하지만, 좀 더 고급스럽게 풀이하자면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그이는 어떠했던가. 그이의 원래 꿈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언론인(목포신문)으로서, 그리고 해운 사업인으로서 무시로 봉착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던 중에 정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시하고 현장정치에 뛰어든 것이니 그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셈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을 암송했던 사람과는 그릇이 달랐다. 그 크기가, 품질이, 품격이 달랐다. 하긴 전자가 주입식 공부에 치중했다면 후자는 창조적 공부를 했던 것이니 다름은 필연이라 할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기의 다름은 퇴임 후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을 암기했던 전직 대통령은 가끔 한 마디씩 해서 코미디언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실소를 우리에게 안겨준 반면 창조적인 공부로 운명을 다하는 순간까지도 민족통일이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었던 전직 대통령은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무거운 숙제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이에게 ‘인동초’라는 별호를 맨 처음에 붙였던 사람이 누구인지 참으로 대단한 혜안을 가졌다. 인동은 연두색으로 봉오리를 맺었다가 하얗게 피어나서 노랗게 물들다가 주황색으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흔히 생노병사라고 하는 삶의 사이클을 그대로 따르는 셈이다.

게다가 인동은 쉽게 죽지도 않고 토질이 좋다거니 나쁘다거니 따지지도 않는다. 흙이 있고 공기 중에 습기가 있는 한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리고 넝쿨을 뻗어 꽃을 피운다. 넝쿨은 뻗어 나가다가 흙을 만나면 거기서 다시 새로운 뿌리를 내린다. 새로운 뿌리에서는 새로운 넝쿨이 나오는데 이 넝쿨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다가 흙을 만나면 또 새로운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해서 5년 전에 달랑 한 포기 옮겨 심었던 인동은 지금 수백 포기로 증식되었다. 이 수백 포기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 수백만 포기로 증식해서 원하는 누구에게나 분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명의 존엄성과 자율성에 관한 공부를 내가 굳이 하고자 하지 않았어도 인동은 어느새 나로 하여금 그 공부의 즐거움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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