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행복원 이야기(1)


# 저푸른하늘처럼


딱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자꾸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그의 눈동자, 그의 웃음소리, 그의 걸음걸이가 내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그 바람에 나는 가던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다. 하려던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길을 걷다가도 무엇인가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그의 얼굴이 떠올라서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되고, 책을 읽다가도 불현듯 그의 얼굴이 생각나서 한참이나 멍하니 있어 버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왜 자꾸 내 시야를 막느냐고, 왜 자꾸 내 생각 속으로 끼어드느냐고, 왜 그렇게 자꾸자꾸 내 일을 방해하느냐고 그를 책망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안도한다. 이 안도의 마음에는 고맙다는 말이 들어 있지만, 나는 감히 고맙다는 말조차도 하지를 못한다. 그런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채우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느낀다. 지금 내 눈 앞에 없는 그를,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보다도 훨씬 강렬하게 느낀다. 이 느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충만감이요, 행복감이다.


# 50년대의 행복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시절이 있다. 아니 있었다. 이 세상에, 이 우주 천지 어디에 행복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냐고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충혈된 눈으로 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금은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누가 그런 질문에 답할 것인가. 누가 그 어마어마한 질문을 받고 감히 그래 이것이다, 하고 말할 것인가.


# 안내할게


# 이름표

지난 3월 중순 사회복지 법인 <행복원>을 처음 찾았을 때 만난 한 소년을 잊을 수 없다. 글마루 도서관에서였다. 그는 나를 처음 본 순간에 나를 알아보았던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사심도 없이 마음속의 절절한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알아보고 있었던 것일까. 옆에서 지도교사가 인사를 시키는데 그는 인사를 못하고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고개조차 못 들고 꽁무니를 빼는 녀석의 수줍음에서 나는 아마 무엇인가를 보았을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무엇이었다거나 무엇이었을 것이라는 식의 단정은 이 자리에서 하지 말기로 하자. 녀석이 나를 알아보고 그 알아봄의 기념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던 것 같다는, 그 순간의 그런 느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선물이라는 말은 중의적이어서 위험할 수도 있다. 뇌물이라는 말을 쓰기가 부끄러워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현실사회를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선물이란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를 채우는 어떤 물질이 있기 마련이다. 마음의 선물이란 말도 있지만, 거침없이 속물화된 사회 속에서 물질이 배재된 선물이란 형용모순이거나 농담으로 읽혀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그 순간 그 소년과 나 사이에 그것이 있었다. 마음이.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소년의 그 행위가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고 녀석을 껴안을듯이 다가섰지만 녀석은 벌써 책꽂이들 속으로 숨어버리고 있었다. 무안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지도교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허벅지를 꼬집는 손이 있었다. 반가워서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는데 녀석은 이내 다시 책꽂이들 뒤로 숨어 버렸다.


# 도서관 이름표

지도교사는 소년의 누나도 함께 있다고 말했다. 두 남매의 엄마도 행복원 출신이라고 했다. 대를 이어 가족이 모두 시설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인데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도 허벅지를 살짝 꼬집고 있었다. 이럴 때 금방 알은 체를 하며 호들갑을 떨면 녀석이 무안해서 도로 숨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르는 체, 무심하게 지도교사의 이야기나 듣고 있었다. 그러자 드디어, 마침내, 녀석이 내 허벅지를 두 손으로 껴안을 듯이 하고는 마구 꼬집어대고 있었다.
“요녀석, 잡았다.”
녀석은 온 몸을 뒤틀어가며 키득거리는 소리로 웃고 있었다. 웃다가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 가운데 한 권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어린양이라고 하는, 혀 짧은 소리여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고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실망스럽다는 듯 다시 책꽂이들 뒤로 가 버리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행복원을 찾아간 원래 목적이 원장 선생님과의 인터뷰였다. 이제 시간이 되어 원장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이런 실수가 있나. 헤어지면서 녀석의 이름을 묻지 못했다. 이름을 모르고 보니 나중에 갔을 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찾을 방법이 없었다. 갈 때마다 녀석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도교사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 아이의 인상착의를 얘기하면 못 찾을 이유는 없을 터이다. 그런데 뭐라고나 할까, 소년과 나 사이에 어떤 묵계가 있었다는 느낌이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애당초 행복원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작고한 전 원장 이초순 여사의 살아온 내력이 내 영혼을 휘어잡았다고나 할까. 그랬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1943년에 징용 대상자인 남편과 결혼을 한 여인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별을 전제로 한 결혼이었다. 아 이런, 이별이 예정된 결혼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시기에 일제는 소위 국민총동원령이라는 것을 내렸다. 젊은 여성은 정신대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회유 내지 사기를 쳐서 끌어가고 젊은 남성은 황군이라는 역시 그럴싸한 이름으로 끌어갔다. 그렇게 끌려간 많은 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돌아왔다. 해방된 조국에서 힘차게 살고자 죽지 않고 실종되지도 않고 열심히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변이 터졌다. 조국은 그녀의 남편을 좌익이라는 이름으로 급히 총살을 했다. 그녀는 삼 개월이 지난 뒤에서야 입고 있는 옷을 보고 남편의 죽음을 알았다.
26세의 여인, 두 딸이 있었다. 시댁에서는 그녀의 독립을 권고했다. 독립자금(?)으로 쌀 한 가마니를 내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달랑 쌀 한 가마니로 시작된 그녀의 눈물겨운 삶은 훗날 사회복지 법인 <고창 행복원>이라는 창대한 꽃으로 피어났다.
그 전기를 한 권 쓰고자 했다. 그 팍팍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그러나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헤쳐온 그 행보 하나하나를 글자에 녹여 한 권의 책으로 엮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행복원을 찾고, 또 찾았다.
고창을 인물의 고장이라고 자찬하면서 내세우는 유력자들의 그 인물들에 대한 불만도 아마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고향이라고 내려왔는데, 와서 보니 이상한 인물들이 고창의 인물로 고무 찬양되고 있었다. 내 눈에는 힘 있는 자들에게 빌붙어 개인의 영달이나 꾀하는 기회주의자로밖에 안 보이는 이들을 어찌 그렇게도 인물이라고 추켜세우는가. 그들의 그러한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는 이제 희망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기회주의와 비루함을 희망으로 배우게 될 터이었다. 그랬다. 그들이 추켜세우는 <인물>들로 인해 고창의 이미지가 오히려 남루해진다는, 나 또한 그 남루 속으로 도매금에 넘어간다는 분노가 제법 있었다. 그리하여 내 나름의 역사관에 근거한 인물을 찾아보자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초순 전 원장이었다.


# 어제의 행복원


# 오늘의 행복원

1940년대에 젊은 남녀가 주고받은 편지와 엽서, 군사우편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일기와 메모 그리고 쓰다 만 원고지도 몇 장 있었다. 고맙게도 선뜻 내주신 그 귀중한 자료들을 집으로 가져와서 해석하고 분석하기를 한 달, 두 달, 석 달을 넘어서던 즈음에 돌연 고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자동차가 없어져 버렸다. 집에서 행복원까지는 28킬로미터 거리였다. 이제는 아무 때고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그 소년이 생각났다.
“야 이거 큰일났다. 자료 분석이 끝나면 사나흘에 한 번씩은 행복원을 찾고자 했는데, 가서 그 녀석이랑 놀고자 했는데 이게 뭐냐.”
다친 데가 아파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는 와중에서도 문득문득 그런 소리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친절한 후배 한 녀석에게 부탁을 했다. “야 나를 행복원에 좀 데려다 주라.”
공식적인 명목은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반환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문제도 없지는 않았다. 남의 집 귀한 편지 자료를 한정없이 보관하고 있다가 망실이라도 되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내심은 자료반환보다 그 소년에게 있었다. 그런데 그날도 역시, 소년은 도서관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그 소년이 보고 싶은 것일까. 사람의 감정이란 사람 자신도 모른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맹랑한가. 사람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다니. 알 수가 없다니. <‘행복원’ 이야기는 다음호에도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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