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허수아비

멀리서 봤을 때 그녀는 색깔이 너무도 요염하고 발랄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지가 온통 푸르른 한여름 산자락 아래 밭두렁에서 선홍빛에 흰색 그리고 담청색이 묘하게 조화된 삼색 의상을 걸치고 두 팔을 한껏 벌린 채로 금방 어디론가 날아갈 듯이 깨금발로 도약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대략 1킬로미터 정도, 아니 8?900미터나 되려나.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중간에 마을이 하나 있었고, 크고 작은 나무들도 많았다. 때문에 그녀는 금방 보였다가는 다시 금방 안 보이는 식으로 내 애를 태우고 있었다.


# 진짜 허수아비

도대체 저 여자가 누구지? 어디서 온 거야? 어쨌든 이런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왜 저런 자세로 서 있는 거야? 무슨 택견을 하는 자세 같기도 하고, 호두까기 인형 같은 데 나오는 발레리나의 포즈 같기도 하고, 저게 대체 무슨 자세인 거야?


# 이게 허수아비라니


# 이것도 허수아비라는데


쏟아지는 의문의 홍수 속에서 나는 참으로 많이 비틀거렸다. 두세 번 정도는 자전거 핸들을 잘못 돌려서 가볍게 넘어지기도 했고, 한 번은 심각하게 개골창 깊이 처박힐 뻔도 했다. 이십대를 통과한 이후 여자의 어떤 모습에 비틀거릴 정도로 현혹되기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서 나는 내심 불안에 떨고 있었다. 까무라칠 정도로 매혹적인 그녀에 비해 나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하는 불안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쩐지 그녀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눈앞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허수아비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그녀가 동화책에 나오는 요정이나 무슨 선녀 같은 것이어서 내가 다가서는 순간에 그만 하르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심사인 채로 그녀의 정체가 사람이 아닌 허수아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뭐랄까, 실망이 아니라 차라리 안도감이었다. 마주하는 순간 달아나 버릴지도 모르는 선녀나 요정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붙박혀 있는 허수아비가 좋다는 식의 참으로 못난 보수적인 안도감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문제는 그렇게 해서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허수아비 앞에서 혼자 키득키득 한참을 웃어대다가 역시 웃음을 질질 흘려가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는 이미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우아한 발레리나 같은 여인으로 내 가슴에 들어와 있었다. 책을 펼치면 책갈피에서 그녀가 도약을 하고 있었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소리도 시원하게 깔깔대고 웃어대며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아, 그녀를 데려와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사실은 잠도 오지 않았다. 푹푹 찌는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아,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를 데려다가 마당에 세워놓으면 찜통 같은 더위는 물론 답답하게 꽉 막힌 정국(?)도 일시에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홀린 듯이 밤중에 길을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데려오지 않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발길을 서두르는데 갑자기 뭔가가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야 그거 절도야, 도둑질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아무리 허수아비라 해도 엄연한 남의 재산이었다. 게다가 밤중이었다. 고추가 한창 익어가는 철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매년 경찰이 바빠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고추 도둑을 막기 위해 밤새 순찰을 도는 경찰에게 허수아비 도둑을 잡았다는 보고서를 쓰게 한다면 뭐랄까, 이것은 서로가 민망한 일이었다.


# 올해는 고추도 풍년이여

어쩔 수 없었다. 현행범으로 연행되기 전에 포기하자 하는 생각으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날이 밝으면 바로 나가서 그녀를 데려오자 하는 다짐을 몇 번이나 해대면서 커피 한 잔을 끓여 홀짝거리고 있는데 이것은 또 뭔가, 속된 말로 미치도록 그녀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았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앉은 채로 이런 생각 저런 계산이나 해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이런 소심한, 이래서야 뭘 할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얼른 가서 그 허수아비를 가져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감히 행동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나, 그런 내가 한심해서 천장을 보고 있는데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 가을이랑게요


서울 생활 정리하고 고창으로 왔을 때 농민회 활동을 하는 후배 하나가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그는 수세폐지 투쟁 당시 적극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이를테면 농민시인이었다. 농민시인에서 노동시인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어느 날 영광군 백수의 해안도로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운반수단은 관광이라는 말이 영 무색할 정도의 커다란 트럭이었고, 그것마저 시동을 한 번 걸 때마다 병들어서 죽어가는 말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족히 삼사 분씩은 귀청을 울려대는 고물 중에서도 최상급 고물차였다.
그런 고물차를 타고 해안도로 관광을 한다고 달리는 중에 그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여기 잠깐만 계시시오 잉”하고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도로 한쪽에는 아름드리 해송이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고추며 토란 같은 것들이 심어진 밭이었다. 중앙선 표시도 없는 도로 한쪽에는 푸른색 그물이 길게 널려 있었다. 그는 그 푸른색 그물의 한쪽을 끌어다가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리고는 트럭에 올라서서 계속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물이 어찌나 긴지 당기고 또 당겨도 끝이 없었다. 보다 못한 내가 트럭에서 내려 그 일을 돕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영문을 몰랐다. 그저 가는 길에 자신의 그물을 걷어가는 것이려니 여겼을 뿐이었다. 자기 것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아는 사람의 것이려니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디서 매우 거친 욕지거리가 날아온다 싶더니 저만치 밭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낫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나 원 참, 뭡니까? 말 좀 해주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도 심장이 벌렁벌렁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상태로 달리기를 얼마나 했던가. 그가 이쯤이면 되겠다 싶었는지 차를 세우자마자 내 입에서 질문이 나왔다. 나는 일단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아이 참 그거 애석하네. 그물을 보는 순간 영감이 떠올라서 말이에요. 그것으로 집을 온통 감싸놓고 그 안에 있으면 내가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기분이 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야아 그것 참, 그런 기분은 어떨까요, 네?”
말문이 막혔다.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진 셈이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 선뜻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황당하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순수한(?) 욕망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내가 만일 그때의 그 시인이었다면, 허수아비를 보고 욕망이 발동하는 순간 그대로 그것을 들고 집으로 왔을 터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왜 못했는가. 그날 이후 열흘이 넘도록 고민을 했지만 답을 얻지도 못했다. 왜 그런 문제의 답 하나도 얻지를 못했는가.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론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탓이었다.


# 아직도 깨꽃은 계속 핀다


# 깨 쏟아지는 소리


생각다 못해 상담을 청하기로 했다.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서 박사를 한 뒤에 개인연구소를 차려놓고 있는 옛 동료에게 이메일을 넣었더니 그날 바로 답이 왔다. 큰 도둑이냐 작은 도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둑의 길을 걷기 마련이라는 식의 매우 혼란스런 답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란 말이에요. 그거 주인이 있는 게 아니에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와 국민 전체가 주인일 수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그렇지가 않다니까. 주인이 없는 거예요. 저마다 자기 손에 있으니까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기는 하지만 웃기는 소리,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는 거지. 합법적인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느냐 이거야.”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허수아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나로서는 “에이, 개떡 같은 소리네”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조언이었다. 이런 개떡 같은 조언에 귀를 기울기보다는 그냥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 급할 땐 이런 허수아비도


아, 이제 끝내야겠다. 너무 더워서 내 정신건강에 이상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빠져 나갈 생각은 안하겠다. 그냥 솔직담백하게 고백을 하자면 허수아비를 훔치고자 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아직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과연 허수아비를 훔쳐올 수 있을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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