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어린 조카들


# 아고 목말라라


금년 추석은 유난히도 긴 휴일에다 폭우까지 겹치는 바람에 농촌의 풍경이 다소 우울해지고 말았다. 수도권 지역에서 일찌감치 내려온 몇몇 사람들은 갑작스런 침수 소식에 짐을 풀자마자 도로 올라가야 했고, 추석 전날에 내려오기로 했던 사람들은 전화로 간신히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고 지은 죄도 없이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그나마 그런 사람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해외로 혹은 국내로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거나 추석 사나흘 전에 이미 떠나버린 까닭에 현지에서 발만 동동 구르느라 놀지도 못하고 죄다 망쳤다는 것을 추석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 추석날 밤의 코스모스

어떤 사람은 발 빠르게 연초부터 이미 계획을 잡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여름철  휴가도 안 쓰고 한몫에 몰아서 원도 한도 없이 놀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간이 9일에서 길게는 13일까지 되는 사람도 있었다. 도시의 삶이라는 것이 내일이면 나아질까, 다시 내일이면 나아질까 늘 그렇게 내일, 내일만 바라보느라 오늘을 살면서도 정작 오늘이 무엇인 줄을 모르는 채 보내기 십상이고 보면 이제 한 번쯤은 그렇게 기존의 모든 인연들을 뒤로 물리고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볼  만한 때가 되었다 싶기도 하다. 서울에 살면서 돈 때문에 별거를 하고 있는 아우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 아고 부끄러라


# 할아버지  유정이요


추석이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아우가 느닷없이 유치원생 딸내미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그야말로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하릴없이 “어쩐 일이다냐? 혹시 실업자 된 거냐?” 등등 묻고 있는데 아우는 다소 염치없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가며 얼버무린다. “노는 날도 많고, 이번에 안 써먹으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어쩌고 그렇게 더듬거리던 아우는 갑자기 전략을 바꾸기로 했던 것인지 표정을 싹 바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마당에 텐트를 치고


# 두 딸과 한 아비가


“애들이 텐트 안에서 자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형님 집 마당이 이렇게 넓고 볼 것도 많은데 다른 데 어디 멀리로 갈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온 거예요. 텐트 쳐놓고 그 안에서 놀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그럴려구요.”
“텐트? 원두막에 모기장 치고 자면 되지 뭘 텐트까지 친다냐? 그리고 밤에는 추워. 새벽에는 아마 덜덜 떨게 될 거다.”
“침낭 있으니까 추위는 상관없고요. 그리고 텐트가 아니면 안돼요.”
“그래?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그래라 그럼.”
텐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우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주마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주마등이라기보다 옴니버스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10대 시절, 20대 시절, 30대 시절의 텐트와 관련된 그림들이 획획 지나가는가 싶더니 어느 한 장면에서 딱 멈추고, 다시 휙휙 지나가다가 또 어느 한 장면에서 멈추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 까르르 깔깔깔


10대 시절에 텐트는 그저 하나의 막연한 로망일 뿐이었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나이에 모래찜질을 가는 어른들을 따라 동호해수욕장을 갔다가 텐트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때 어른들은 집 없는 거지들이 저 안에서 산다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가능한 한 그쪽으로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자꾸 돌아봐지고 있었다. 어른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어른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몇 년 뒤에 선운사로 소풍을 갔다가 다시 보게 된 텐트는 결코 거지들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텐트를 하나 갖는 게 소원이 되었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 요량이 없는 까닭에 그 뒤로도 한참이나 지난 뒤인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소원성취를 하게 되었다. 텐트를 손에 넣은 뒤로 툭하면 산으로 바다로 나돌아 다녔던 그 시절에 내가 보고 느끼며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글쎄, 슬프지만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뒤로 어찌어찌 최루탄 직격탄에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이런저런 사고와 사건을 거친 뒤로 삼십대 후반에 이르러 소위 ‘자살여행’이라는 것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텐트는 이제 몸에 걸치는 옷가지처럼 없어서는 안 될 내 생의 반쪽으로 격상되었다.


# 보자고 하니 는데


그 시절에 텐트는 작을수록 좋았고 작아야만 했다. 배낭 안에 코펠이며 버너며 쌀에 된장에 고추장에 아주 간단한 반찬거리를 차곡차곡 쟁이고 마지막으로 속옷 몇 장 그리고 침낭을 얹고 텐트를 얹은 뒤에 꽁꽁 묶어야 하는데 여럿이 한 조가 되어 떠나는 여행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떠나는 여행에 부피가 큰 텐트는 도대체가 좋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당시의 텐트란 그야말로 기어 들어가서 기어 나오는,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만 피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런데 이번에 아우가 마당에서 치고 있는 텐트를 보고 있자니 하품이 절로 나왔다. 자동차 안에서 끝도 없이 부품들을 꺼내다가 설치하는데 그것은 뭐랄까, 내가 기억하는 텐트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길어도 3,4분을 넘지 않았던 텐트 하나 설치하는 데 드는 시간이 무려 한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고, 크기도 텐트라기보다는 천막 아니 차라리 이동식 주택이라 함이 옳을 것 같았다. 게다가 실내는 또 어떤가. 바닥에 따로 방수천을 깔고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다시 공기로 작동되는 매트리스를 깔고 천장에는 전등까지 달아서 완전히 고급 방갈로를 연상케 하는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쨌든 꼬마 녀석들은 그 안에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뒤집어지고 깔깔거리며 밤이 늦도록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어쨌던가. 그랬는데도 아침 해가 떠오르자 녀석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또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제 엄마가 그렇게도 달래고 타이르고 협박에 폭력을 행사해도 일어나기 싫다고 징징대던 아이들이 꽃들이 우거진 마당의 텐트 안에서는 천체의 운행원리를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깡총거리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잠시나마 자울거릴 법도 하건만 그렇지도 않았다. 산소에 성묘를 가는 제 아비를 따라 비탈길도 마다하지 않고 거뜬거뜬 오르는가 싶더니 아예 산소 위에 올라가서 조상님께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등 재롱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 땅에는 별꽃이 피고


도대체 자연 속의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도 활기차게 하는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시나브로 우울해지고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도 활기찬 저 아이들이 머잖아 학교라는 감옥에 수용되어야 한다. 이 아이들을 지금 이런 상태 그대로 자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학교라는 사육공간에서 경쟁이데올로기에 세뇌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이 아이들은 늙어간다. 나이는 젊어도 영혼은 늙은 채로 자본의 노예가 되어 허덕거리거나 혹은 자본의 충견이 되어 착취를 대신해 주는 머슴살이로 정년을 채우고 연금 생활자로 생을 마감할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것인 인생인가. 이것밖에 없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면 도시로 진출해서 도시의 어떤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뒤부터 극심한 혼란에 빠졌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녀보지 않은 까닭에 비교적 자유한 영혼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뒤늦게 무슨 생뚱맞은 고시바람이 들어서 종로의 행정고시 학원을 드나드는 동안 폭삭 삭아 버렸다. 그 기간이래봐야 고작 1년 남짓이었지만 영혼이 삭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영혼이 삭은 채로 무엇을 한다고 해본들 그 일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찌어찌 돈푼이나 손에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그런 돈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무슨 영광이 있을 것인가. 내가 나를 살지 못하고 돈을 살아준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돈으로 인해 친구를 잃고 후배를 잃고 영혼마저 잃어버리고 있다는   충격적인 발견을 하던 그 시기에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너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나 자신의 시체마저도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코끼리나 호랑이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고자 했다. 그런 장소를 찾아서, 그리고 방법을 궁리하고자 배낭에 텐트를 꾸려 담고 ‘자살여행’을 시작했다. 그 기간이 3년 남짓이었다. 3년여의 노력 끝에 발견한 것은 그러나 죽음의 방식이 아니었다. 문학이었다.
이 세상에는 문학이라고 하는 인간의 죽은 영혼을 아주 친절하게 위로하고 다독여서 부활시켜 주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은 뭐라고나 할까, 그 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게오르규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서두에서 썼던 문장이 눈앞에서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고물고물한다는 느낌이 되곤 한다.
“벌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무튼지 그렇다. 세상모르고 까르르 깔깔 웃어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고 우울해서 그만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미안하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했던가. 갑작스런 폭우와 폭설 그리고 폭풍으로 정리되어지는 오늘날의 기상이변도 결국은 나와 같은 기성세대들의 오만과 독선과 탐욕이 불러들인 재앙이 아니던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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