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19 - 궁궐 나들이 4 경복궁 최종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조선왕조의 제일 궁궐인 경복궁을 둘러봅니다.


# 왕실의 또 다른 후원이었던 ‘향원정’은 아름다운 여성적 이미지가 강했다.

창덕궁의 중심 건물은 모두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중심을 이루는 근정전과 사정전, ‘내전’의 강녕전과 교태전이 궁궐의 중심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가운데 양쪽으로 경회루와 같은 후원, 대비가 머물렀던 ‘자경전’, 왕세자가 생활했던 ‘동궁’ 등이 배치돼 있다.
경복궁 관람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조선 제일의 궁궐 답게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경복궁은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현재 대통령이 살고 있는 청와대 인근도 과거엔 모두 경복궁 영역이었다.

‘교태전’ 뒤 ‘후궁들의 영역’

왕비가 머물렀던 ‘교태전’의 북쪽은 흥복전과 여러 빈들의 거처인 후궁들의 영역이었다. 조선 왕조 여인들의 사랑과 질투가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이 바로 이 곳을 배경으로 펼쳐졌을 것이다.
흥복전은 내각 회의를 개최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제법 넓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영역에서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함화당과 집경당 뿐이다. 이 곳에서 외국 사신을 접견한 기록이 간간히 등장할 뿐 건물의 용도는 명확치 않다.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해주는 높은 복도가 남아있어 원래 궁궐의 복잡한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집경당에서 돌출된 누마루에선 북쪽에 있는 향원정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제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헐렸지만 함화당과 집경당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사무실로 이용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남성적 ‘경회루’ 여성적 ‘향원정’

경복궁 중건 당시 고종은 신무문 북쪽에 샘물과 정자, 누각을 갖춘 후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천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 휴식 공간이 향원정이다. 향원정의 아담하고 오묘한 정취는 경회루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 향원정


# 이 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등이 켜졌다.

향원정은 왕실 가족들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사용했던 정원이었다. 경회루가 공식 행사를 비롯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제약을 받았던 반면 비교적 이 곳은 자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라면 향원정은 여성적이고 아담하다. 마치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향원정은 ‘향기가 멀리 퍼지다’는 뜻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특히 이 곳을 즐겼다. 오늘 날에도 그윽하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많은 사진가들이 찾는 곳이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엔 서현정이, 이후엔 취로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으로 1873년(고종 10) 고종이 향원정을 주제로 유생들의 전강(시험의 하나)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장방형의 연못을 파고 원형의 인공섬을 만들어 그 위에 향원정을 지었는데 역시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사상에서 비롯됐다. 작지만 다양한 색감과 문양을 통해 비교적 화려하게 지어졌다.
육모 지붕을 얹은 2층 구조로 바깥으로는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러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남쪽의 다리는 ‘취향교’로 정원의 단아한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원래는 북쪽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 남향으로 복원한 것이다.
향원정의 연못인 향원지 서북쪽엔 ‘열상진원’이 있는데 여기서 흘러나오는 물이 향원정을 채우고 나서 경회루의 연못까지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야 한다는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을 받아 물길이 직각으로 꺾여 들어간다.
향원정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발상지’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고종의 어명으로 이 곳에 발전소를 만들고 1887년 3월 건청궁의 전등에 점화했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2년 빨리 이 땅에 또 다른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중국풍 물씬 ‘건청궁’ 일대

향원정 북쪽에 세워진 건청궁엔 구한말 서구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세를 새로운 각오로 돌파하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어려있는 곳이다. 한편으론 부친인 대원군에서 벗어나 자립하겠다는 의도로 있었다고 한다. 얼마전부터 건청궁 내부가 개방됐다.


# 건청궁 입구

고종은 1873년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건청궁를 지었다.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처리했다.



# 고종이 머물렀던 장안당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다. 집옥재 옆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고종이 머물던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됐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양관’이라고도 불렸다.



# 명성왕후가 시해당한 건녕합

하지만 곤녕합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당함으로써 건청궁의 ‘짧은 영광’은 막을 내렸다. 명성왕후의 시신은 옥후루에 잠시 안치됐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참극을 겪은 고종은 이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덕수궁에서 지냈다.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가 2007년 복원됐다.

새단장한 ‘광화문 광장’

최근 복원된 건청궁 외에도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신 관을 능으로 옮길 때까지 모시는 빈전으로 쓰인 태원전도 최근 복원됐다.


# 집옥재 일대

집옥재 일대도 고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때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와 협길당 등을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와 서재와 사신 접견 장소로 삼았다.




# 후궁들의 영역 ‘함화당’과 ‘집경당’ 일대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지었다.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으로 지어져 궁궐 내에서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된다.


#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엔 궁궐 건물 외에도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두 개의 박물관이 인접해 있다. 두 곳 모두 경복궁 입장권을 구입하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올해까지만 무료 개방이라고 하니 서두르는게 좋다.
위치상 건청궁까지 궁궐 관람을 마친 뒤 민속박물관부터 찾는 게 좋다. 우리민족의 생활문화 뿐 아니라 세계의 풍속 등을 보여주는 알찬 기획 전시물로 가득하다. 화요일이 휴관일이다. 박물관 건물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의 팔상전,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등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을 재현했다고 한다. 민속박물관 동쪽엔 1960대 전후의 풍경이 재현돼 있다.



# 1960-1970년대를 재현

경복궁 입구 국립고궁박물관은 궁궐을 나서면서 들르는 게 편하다. 전시실은 제왕기록실, 국가의례실, 궁궐건축실, 과학문화실, 왕실생활실, 탄생교육실, 왕실문예실, 대한제국실, 궁중회화실, 궁중음악실, 어가의장실, 자격루실 등으로 구성돼 다양한 궁중 유물을 보여준다.


#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 광장

다 둘러본 뒤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왕, 이순신 전시관으로 경복궁 답사를 마무리하면 가을 하루를 보내기에 더 없이 좋다.

- 다음 호에선 궁궐 돌아보기 네 번째 순서로 경희궁을 돌아봅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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