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끽다거’ 찻집의 후배


# 농촌의 현실을 빼다박은 빈 집

보건복지부의 관리를 받는 결혼 사이트에서 농업을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농민들의 심사가 흉흉해질 즈음 고창 군청 앞에서 찻집 겸 술집을 운영하던 후배 하나가 광주로 취업을 나갔다. 그 시기는 공교롭다고나 할까, 채소값 폭등으로 못 살겠다는 도시 사람들의 아우성이 최고점을 찍던 무렵이기도 했다.


# 금년에 새로 빈 집

그 후배의 원래 꿈은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양식 가운데 하나인 농산물이 풍성한 시골에서 다른 또 하나의 양식인 책을 가게 안에 잔뜩 꽂아놓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더불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는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꿈을 그는 오랫동안 꾸어 왔다. 그런데 책을 구입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꿈은 늘 꿈으로만 머물렀다.
돈을 벌어서 책을 구입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찻집을 시작했다. 간판은 거창하게도 저 유명한 조주 선사의 공안 가운데 하나인 “차나 한잔 마시게”라는 내용의 <끽다거(喫茶去)>를 차용해서 썼다. <끽다거>나마나 차를 팔아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책을 구입한다는 그의 꿈은 그야말로 꿈이었을 뿐이었다.
가게 임대료 지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찻집에 술집을 겸하기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소주며 맥주 같은 술들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차는 점차 뒤로 밀려났고, 나중에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풍경이 오히려 희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간판은 여전히 찻집이었지만 내용은 완전히 술집이 된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진지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살겠다는 그의 꿈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자꾸만 쭈그러들어 갔고,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이런 등등의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들 앞에서 그는 남모르게 비틀거렸다. 그럴 즈음 그의 말 못할 마음을 읽어주었다고나 할까. 가만히 내미는 작은 손이 있었다. 정작 주인인 그 자신은 기억도 잘 못하는 그 여인은 가끔 한 번씩 찾아오는 이를테면 <끽다거>의 단골손님이었다. 그 여인과 어느 하루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연애를 하고, 그리고 꽉 찬 나이 마흔 살에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혼식을 올리고 채 일 년이 안 되어 아이가 생겼다. 아내의 뱃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큰일났다. 모아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빚만 잔뜩 지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랬다. <끽다거>는 찻집에서 술집으로 내용이 바뀐 뒤로 손님이 다소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관리비나 겨우 충당하고 있을 뿐 생활에는 거의 아무 도움이 못 되고 있었다. 그나마 손님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결국 광주로 취업을 나가기로 했다. 고창에서 광주까지 출퇴근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보면 머잖아 그는 아예 고창을 떠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때 30만을 바라보기도 했었다는 고창의 인구가 7만이 붕괴되고 지금은 6만선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곧 5만선으로 내려앉을 것이 뻔해 보이는 상황을 후배도 한 몫 거들고 있는 셈이었다.




농사가 주업인 농촌에서 농업의 위기는 자영업의 몰락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영업자들이 몰락하는 곳에서는 사람이 살기가 어렵다. 새나 곤충도 아니고 공산품에 이미 길들여진 사람들이 생필품 하나 사는 데도 멀리까지 가야만 하는 형편이고 보니 결국은 농촌을 떠나게 된다. 악순환이라고나 할까.
농업의 위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농업의 위기라는 말이 각종 매체는 물론 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정말이지 이렇게도 이례적인 위기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위기는 오래도 지속되어 왔다.


# 논을 파서 조성중인 연못 겸 낚시터

국가의 존재 이유는 어떤 분야에서든 위기가 감지되었을 때 그것을 적극 나서서 치유하는 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는 국민을 상대로 성동격서 식의 전략을 구사하자는 것도 아니겠고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인지 입으로는 위기, 위기 하면서도 행동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농업을 최하위 계급으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 등 관계 기관에서는 분류 자체를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간단하게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아마 대통령의 국정철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인수위에서 농업 관련 기구들을 퇴출시키려 했던 사건을 농민들은 아직 잊지 않았다.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폐기안을 철회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존치된 기구에 그 무슨 정책적인 배려가 있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 메타쉐콰이어 묘목장

대통령의 농업에 관한 시각은 극도의 단순성을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대통령의 눈으로 볼 때 농업은 하나의 산업일 뿐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제품을 퇴출시키듯이 농업 또한 경쟁력이 없으니 그렇게 퇴출시켜도 무방하다는 시각이 대통령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농촌에서 사는 사람의 눈에 도시의 채소값 소동은 뭔가 공허하다는 느낌이 있다. 자기가 자기 집에 불을 질러놓고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질러대며 두 발을 동동 구르는 현장을 목격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용은 없이 공책에 쓰인 글자만을 읽어대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


# 금년 봄에 식재한 회양목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비옥한 토지가 사라져서 채소값이 치솟았다는 진단도 있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농민들은 알고 있다. 문제가 그렇게 일시적이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채소값 폭등 소동은 앞으로 치러야 할 기나긴 고통의 시작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농민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도시에서 소비하는 반찬거리들은 대부분 중소 영세 농민들의 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땅이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은 특작을 하지 반찬거리 같은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중소 영세 농민들의 특징을 들자면 아마도 자기가 일을 하고도 자기가 한 일의 가격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몇 달 며칠 동안 매달려서 얼마만큼의 수확을 했는데 얼마를 받았으니 얼마가 손해라는 식의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기도 회양목 저기도 회양목

이것을 보다 알기 쉽게 산술적으로 풀이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다른 데 가서 하루 품을 팔면 일당으로 6만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농사에만 전념할 경우 아주 드물게는 6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5만원이나 4만원선에서 머물고 심하면 1만원도 채 안 되고 더 심하면 아예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거기서도 더 심할 경우에는 약값에 비료값만 농협에 잔뜩 빚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 농사가 없이 품팔이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겨울이 왔을 때 보일러에 기름을 넣지만 자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난방비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산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 있기도 하지만 농촌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을 사서 농사를 짓는 경우 품삯을 치르고 나면 정작 땅주인 자신은 겨울 난방비조차 없어서 쩔쩔 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농사를 짓는다. 왜? 바보라서? 아니다. 사람이 먹는 것을 돈으로 마구 계산하면 안 된다는 오랜 품성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농민들의 그러한 품성마저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른바 기업농을 적극 권장하고 있고 유도해내고 있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일부 품종의 경우 대규모 단지에는 미약하나마 보상의 혜택이 돌아가지만 한두 마지기 정도의 영세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등으로 그 정책은 이미 가동 단계에 접어들었다. 노골적으로 차별화된 이런 불평등 정책마저도 영세 농민들은 가난이 죄라는 저 오래된 체념과 달관으로 소처럼 말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체념과 달관의 풍경을 농촌에서 볼 날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영세 농민들의 대다수는 허리 굽은 노인들이다. 4,50대 젊은 층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소처럼 말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식의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들은 착취당하는 것이 너무도 뻔한 농사를 짓느니 차라리 밭에는 관상용 나무를 심고 논에는 연못을 파거나 낚시터를 만들어서 살아갈 계산을 한다. 노인 농민이 돌아가시면 그 자녀들은 그 땅에 또 나무를 심는다. 이렇게 해서 농촌은 지금 나무 심기 유행이 불고 있다.


# 목이 거의 다 죽었지만 관리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만도 최근 2,3년 동안 적어도 4,5십 마지기의 논밭이 회양목이나 철쭉 혹은 소나무 같은 조경수로 채워졌다. 참깨를 털고 서리태를 수확하던, 고추를 따고 생강을 캐던 땅이 그만큼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식재된 조경수를 알뜰히 관리하느냐 하면 어떤 경우에는 그것조차도 아니다. 자라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둔다. 절망도 이런 상징적인 절망이 없다.
농업이 완전 기업화 되었을 경우의 그림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기업이란 누가 뭐래도 자본을 축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본은 자본 나름의 투철한 논리가 있다. 이윤이 없으면 당장 그만두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것 말이다. 이제 머잖아 도시의 서민들은 수입의 절반 이상을 반찬거리에 쏟아 부어야 할지도 모른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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