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두꺼비




매일 한 차례씩은 아니었어도, 최소한 사나흘에 한 번씩은 그 과묵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던 두꺼비가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아하 이거였구나 싶게 연일 무서리가 내렸다. 제일 먼저 토마토 이파리가 다 타 버렸다. 잎을 따서 말리고자 열심히 길러온 아주까리 잎은 축축 늘어지고, 가을이면 갑자기 바빠져서 열매가 마구 열리는 호박은 넝쿨이 온통 뜨거운 물에 데친 형국이 되고 말았는가 하면 가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제비콩은 아직 한 알도 익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서리 맞은 무엇 꼴이 되어 버렸다.


# 열매도 맺지 않은 채 서리맞은 제비콩

아직은 10월인데, 10월에 이런 날씨가 어느 시절에 또 있었던가 싶다. 봄에는 5월이 다 되도록 눈발이 분분하고 얼음이 얼더니 가을에는 또 이렇다. 이렇게 되면 기상이변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이변’스럽지 않고 상투적인 술어가 되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두꺼비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그렇게도 재빠르게 몸을 감출 수 있었을까.


# 서리에 망가진 호박꽃

붙박이로 서 있는 식물들은 갇힌 것도 아니면서 감옥에 갇힌 듯 꼼짝을 못하고 죽어가지만 두꺼비는 움직이는 생명이라서 다가오는 재앙을 감지하고 미리서 피난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인간은, 움직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추론까지 할 줄 아는 인간은 재앙이 저만치 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전한 피난을 못하고 항상 피해가 얼마라느니 계산하기에 바쁘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졌거나 아니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피난 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두꺼비와의 인연은 저 아득한 유년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즈음 사내아이의 불알 한쪽에 거품이 차서 부풀어 오르는 병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여자아이들은 아마 거의 알 수 없는 이런 고통스런 일이 발생하면 할머니께서 가만히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두꺼비를 잡아오라 하셨다. 잡아온 두꺼비를 그릇에 넣어 뚜껑을 덮어놓고 하룻밤을 새고 나면 두꺼비의 오줌이 차 있게 되는데 그 오줌에 콩을 불렸다가 다시 말려서 볶아 먹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부푼 불알 한쪽이 즉각 원상회복되었지 여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것은 밤에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했던 것만큼이나 보편적인 민간요법 가운데 하나였다.
생긴 것이 울퉁불퉁하고 개구리 비슷하면서도 개구리처럼 자발스럽게 소리를 낸다든가 뛰어다니는 법이 없이 그저 눈이나 끔벅끔벅할 뿐인 두꺼비는 꽤나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무서워서 감히 손으로 만져보지는 못하면서도 한참씩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고는 했었다. 그러한 호기심이 계속 싹을 틔우고 발달했더라면 나중에 생물학 계통에서 무엇이라도 하나 보람차게 할 수 있었겠지만, 그쪽으로는 소질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무렵에 한창 유행이던 새마을운동 바람을 타고 정신이 그만 허공으로 날아가 있었던 것인지 하여튼 나이가 들면서 시나브로 잊혀지고 말았다. 내 가슴 속의 순정(?)도 아마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전쟁이다. 정신 바싹 차리고 두 눈 부릅뜨고 좌우사방을 살펴라. 손에 쥐어지는 것 없는 일에는 마음 쓰지 말거라. 등등 이런 개떡 같은 삶의 철학이 춤을 추는 세상 속에서 망가지고 혼탁해진 정신을 고물 자동차처럼 끌고 마침내 귀향을 했을 때, 그 해의 어느 날 고추밭에서 불현 두꺼비를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엔가 어떤 책을 읽던 중에 “두꺼비가 파리 잡아먹듯”이라는 문장을 발견하고는 그 두꺼비를 모셔다가 며칠 동거를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두꺼비와 파리가 연결되는 말을 무수히도 들었건만 아직 한 번도 그 실상을 목도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칼날 같은 반성과 부끄러움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에는 바보 같이 커다란 종이상자를 두꺼비의 집으로 정하고 그 안에 파리를 잡아서 넣어주었다.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는 두꺼비 세계의 불문율을 고려하지 않은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두꺼비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걸 어떻게 하나. 궁리 끝에 뚜껑이 있는 커다란 유리병을 구해다가 그 안에 두꺼비를 넣고 파리 생포에 나섰다. 종이 상자에는 살아 있는 파리를 넣어줄 수도 없거니와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정말이지 두꺼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눈은커녕 그 어떤 피부조직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 혀만을 내밀어서 파리를 나꿔채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혀와 육체가 마치 독립된 기관인 듯이 순간적으로 혀가 길게 쑥 나왔다가 사라졌는데 파리 또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두꺼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두꺼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일차원적인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책에서 읽은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헤어진 두꺼비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지금의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였다. 빌려 살던 집이 팔렸다고, 비워 달라고 해서 정신없이 3년 동안 ‘노가다’를 해서 집을 한 채 샀는데 이삿짐을 풀던 날 두꺼비가 눈에 띄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마리의 두꺼비가 마당 이곳저곳 잡초들 속에서 마치 수행하는 수도자들처럼 소리 없이 걷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두꺼비와의 본격적인 동거가 시작되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갓난아이 주먹 정도의 크기였던 두꺼비들은 이제 어른 주먹을 넘어섰다. 매면 봄이면 나 왔어요, 하는 듯이 어느 날 문득 보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늦가을이면 인사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키우는 동안 두꺼비는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생식을 좋아해서 살아 있는 것만을 먹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 두꺼비는 생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눈이 있어서 눈을 끔벅거리기는 하지만,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본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는 인간이 감히 헤아리기 어렵지만, 먹을 것이라든가 그런 어떤 재물 따위에 눈을 쓰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찮은 현상 따위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두꺼비에게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인데 글쎄, 무엇이 계기가 되어 그런 단호한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하여 두꺼비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보고 생각하며 배워야 할 거리를 너무도 많이 제공하는 두꺼비,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 두꺼비의 그런 매력을 모르는 것 같다. 재작년이었다. 일산에 사는 동생 내외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데 고추라도 좀 따 가라고 했더니 제수씨가 “네에”하고 소리도 경쾌하게 고추밭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채 일 분 도 안 되어 “꺄악”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자세가 어찌나 황망한지 고추 바구니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제수씨 자신은 스무 걸음쯤이나 엎어질 듯이 달려 나와서는 덜퍼덕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에요, 왜 그래요?” 했더니
“두, 두, 두꺼비, 두꺼비가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두꺼비가 뭐, 어디 물어뜯고 할퀴었어요?”
“아니요.”
“그럼, 뭐라고 마구 욕이라도 했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난리에요?”
“무섭잖아요. 징그럽고.”
“지랄한다. 아이까지 낳은 아이 엄마가 그런 선입견이나 갖고 있어서야 쓰겠어요. 정작 소리쳐 고발해야 할 대상 앞에서는 나 죽었어 하고 고개를 숙이면서, 그렇죠? 그래서야 어찌 아이를 제대로 키우겠어요. 얼른 두꺼비에게 사과하세요.”
“네에?”
제수씨는 황당해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린 채 멍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이 아줌마가 혹시 두꺼비를 밟아버린 것이나 아닌가 싶어 고추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새삼스레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그때는 정말로 제수씨의 안위보다는 두꺼비의 생사 여부가 걱정스러웠을 정도로 두꺼비는 이미 내 스승이 되어 있었다.     


             
두꺼비를 인간의 용어에 빗대어서 감히 정의를 하자면, 그는 수행자다. 묵언수행자.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어디론가 끊임없이 가고 있는 그런 수행자. 실제로 두꺼비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수풀을 버리고 나와서 돌아다닌다. 무엇을 찾는 듯이, 누구를 마중하는 듯이 그러나 과묵하게 천천히 돌아다닌다. 물두꺼비들은 아예 자동차가 마구 달리는 도로 위로 나와서 자동차에 치여 죽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속에서 두꺼비들이 무엇을 찾는 것인지,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나는 당연하게도 아직은 모른다. 아직은 모르지만, 언제인가는 알게 되리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것조차도 모른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으랴.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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