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어느 밭뙈기 장사


# 통배추

몸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고 움츠러드는 계절이면 으레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이곳 전북 고창에 와서 일 년도 넘게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다가 바깥나들이를 시작했을 때 미술협회 관계자 한 사람이 어느 하루 어디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 나섰다가 그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대하드라마 같은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본디 남의 이야기에 잘 빠져드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나 여인들의 이야기는 내 육체의 아드레날린 같은 것들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고나 할까,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가 않고 정신은 오히려 또렷또렷해져서 내가 살아 있다는 기분을 마치 손으로 새를 잡았을 때처럼 확실하게 느끼게 하는 마력이 여인들의 살아온 이야기 속에는 있었다. 주인공이 누가 되었건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는 반드시 어머니나 이모 혹은 고모나 누이 중에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바싹바싹 다가앉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인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다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남자 못지않게 이것저것 여러 장치와 계산기를 이야기 속에 깔아두는 여인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날 만난 그 밭뙈기 장사 여인은 계산기나 복잡한 장치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랬다. 그는 그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밭뙈기 장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밭뙈기 장사를 일단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아마도 ‘밭뙈기’라고 하는 용어에서 풍기는 탐욕적인 이미지와 거기에 덧칠해진 지난 날의 소문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뭔가를 깡그리 쓸어가는, 혹은 통째로 가져가서 혼자만 잘먹고 잘살겠다는 강한 이기심 같은 것이 ‘밭뙈기’라는 용어에서는 풍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밭뙈기 장사는 거의 조폭 수준의 험악한 정신을 지닌 남자들일 거라는 선입견이 내게 있었다. 나의 그러한 선입견을 그 여인이 일거에 몰아내준 것은 아니지만, 밭뙈기 장사 중에도 사람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 양배추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나는 지금도 밭뙈기 장사를, 사람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세한 이유와 구체적인 사례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하게 되겠지만 일단 그들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어떤 특징 즉 ‘돈이 아니면 하지를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특징을 굳이 번역하자면 일종의 잔인성이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장사가 있지만 밭뙈기 장사들에게서 발견되는 이 특이한 잔인성을 찾아보기는 사실 어렵다. 물론 일부 대기업이나 대형 유통업체의 잔혹성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종교인들 중에서 유별난 광신도를 연상케 하는 어떤 것, 요컨대 신의 이름이라면 그 어떤 일도 과감하게 처리하듯이 돈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투철한 철학으로 무장한 밭뙈기 장사들도 당연히 사람이긴 하다.
그런데 사람치고는 매우 이상하다. 오다가다 한 번씩 만나거나 적당히 그저 술친구나 혹은 골프친구 정도로 지낼 경우에는 전혀 알 수 없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어떤 것이 밭뙈기 장사들에게는 있다.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 년 이상 삼 년 정도는 그들과 친구를 해봐야 한다. 그러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그들은 절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보통 사람으로 살고자 하지 않고 보통 사람으로 남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일종의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인다.


# 풀과 함께 자라는 무밭

신 중에는 여러 신이 있겠지만 그들이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돈이다. 돈의 신이 되고자 한다. 처음에는 돈이 궁해서 돈에게 복종을 했고, 그리하여 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돈이 원하는 대로만 생각도 했지만 마침내 돈을 손에 넣고 난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는 그 자신이 돈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돈이 된 뒤에는 돈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돈의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많은 밭뙈기 장사들 가운데 내가 만난 그 여인은 다소 별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돈의 신이 되기보다 사람이 되고자 했다고나 할까. 삼십 년도 넘게 밭뙈기 장사를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어떤 것, 이를테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본래의 모습을 찾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듯한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는 미술협회 후원자였고, 문학소녀였던 자신의 옛 시절을 자주 회상하며 자동차에 소설이며 시집 같은 것들을 몇 상자씩 싣고 다니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결과적으로 다른 많은 밭뙈기 장사들의 조롱과 반감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왕따를 당하고 업계를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 알타리무

지난 5,6년 동안 나로 하여금 밭뙈기 장사들의 이런저런 다양한 세계를 보고 느끼며 생각하게 해주었던 그가 고창을 떠난 지도 벌써 두 해가 되어간다. 특이하게도 고창에는 채소에 관한 한 경상도 쪽 자본이 많이 들어와서 활동을 하는데 그 여인 역시 그쪽 사람이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의 고향이 있는 경상도의 해인사 인근 고장에서 나고 자라서 결혼을 한 뒤에 대구로 이사를 했었다는 그 여인에게도 물론 이름은 있지만, 여기서 본명을 밝힐 수는 없으므로 편의상 ‘옥말임’이라는 가명을 쓰기로 한다.
노태우는 물태우라서 뜯어볼 것도 없고, 전두환은 영웅이라고 오랜 세월 여기고 있었지만 가진 돈이 이십 몇 만원밖에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은 뒤로 완전히 실망했다고 말하는 그가 결혼을 한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여중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뒤로 실의에 빠져 단풍나무 밑에 앉아 시집이나 뒤적거리는 세월이 삼 년인가 사 년인가 되던 어느 하루 그에게 중매가 들어왔고, 중매가 들어오자마자 부모는 딸을 내다 버리듯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결혼을 하고 일 년 뒤에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젖을 떼기도 전에 또 아이가 들어섰다. 둘째 딸을 낳고 그 아이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또 아이가 들어서서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세 아이가 거의 고만고만하게 보기도 좋게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세상 시시해서 못 살겠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던 일에도 흥미를 잃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직업처럼 하기를 일 년,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살림을 포기하고 절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절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 낳고 애 키우면 살림 사는 게 시시해서?”
“하이고 내사 참말로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더만.”
“그렇게 졸지에 가장이 되는 바람에 이 장사를 시작하신 것이로군요?”
“아니라 예. 우리 시댁이 그때만 해도 잘 나갔다 아입니꺼. 정보기관에서 중요한 보직을 맡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주로 군대를 배경으로 두고 있었지 예. 그것을 배경으로 내가 맨 처음 시작한 것이 군부대에 배추와 무 같은 것들을 납품하는 것이었다 아입니꺼.”
수천 명의 군인들이 먹을 김칫거리를 군부대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량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그 세계를 몰라서 중간 거래상으로부터 넘겨받아 납품을 했다. 그 중간거래상이 결국은 밭뙈기 장사였다. 어느 날 물건이 제때에 도착을 하지 않아서 현장을 달려간 옥말임씨. 그는 그날 밭뙈기 장사에게 배추밭을 통째로 넘기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농부를 만나게 된다.
“그날 그 농사꾼이 나한테 하는 얘기를 나중에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야, 내가 군부대에 납품하는 가격의 십분의 일도 안 된 기라. 농사꾼이 중간상인한테 넘긴 가격이 말이지라.”


# 이제 포기안기가 시작된 배추

이것을 계기로 그는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농촌을 돌아다니며 채소밭을 사 들이고 그것을 군부대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부대장이 바뀌고 조달방침 또한 바뀌면서 그의 납품권한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납품권을 잃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보폭을 넓혀 주었다.
그렇게 하겠다는 치밀한 계획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밭뙈기 장사의 길로 들어선 옥말임씨. 그는 이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친정에 맡기고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봄, 가을에는 전라도에서, 여름에는 강원도에서, 겨울에는 제주도에서 여관방을 얻어놓고 전화요금으로만 한 달에 수백 만원씩을 납부하는 상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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