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예산안 강행 처리 거센 ‘후폭풍’

한나라당이 내년도 예산안을 일방적으로 강해 처리한 것을 놓고 정국이 대혼돈에 빠졌다. 민주당 등 야당은 이에 대해 강력 반발하며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여당 내부에서조차 비판론과 자성론이 쏟아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새해 예산안 강행 처리를 놓고 연말 정국이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었다. 한나라당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새해 예산안에 민생 및 당 공약 예산이 반영되지 않은 책임을 지고 당직을 사퇴했지만, 민주당은 이를 ‘꼬리 자르기’라고 비판하며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사과, 박희태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힘의 원리’만이 강조됐던 예산안 처리는 청와대와 여당 모두에게 상당한 부메랑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누더기 예산이 몸싸움 끝에 강행 처리되며 후유증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지난 8일 예산처리 과정에서 영유아 필수예방접종 지원예산이 사라지고, 템플스테이 예산이 삭감되는 등 핵심예산이 잘려나가면서 정부․여당은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 국회의장과 이상득 전 부의장, 이주영 예결특위 위원장 등 실세들은 자기몫을 철저하게 챙긴 것으로 드러나 예산 졸속처리에 대한 심각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국회와 한나라당․민주당 등에 따르면 2011년 예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12세 이하 영유아들이 민간병원에서 8종의 필수예방접종을 받을 때 국가가 일부를 보조하도록 편성한 `필수예방접종 국가부담사업` 예산 338억8400만원이 사라졌다. 영유아 필수예방접종비용 지원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으로 저출산대책의 핵심사업 중 하나로 평가돼 왔다.

올해 285억원이 편성됐던 방학 중 결식아동 급식지원 예산도 포함되지 않았다. A형간염 백신지원 예산 62억원도 미반영됐다.

‘종교갈등’ 확산 분위기

상임위원회에서 435억원 증액 편성됐던 경로당 난방비 지원은 절반 수준인 218억원이 잘려나갔고, 지역아동센터 운영비 지원도 상임위 증액요구 267억원의 14%인 38억만이 반영됐다.

특히 불교계와 관계개선을 위해 편성된 템플스테이 지원예산 180억원 중 57억원 가량이 삭감됐고, 야당 성향으로 바뀌고 있는 강원도 민심을 잡기 위해 약속했던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 사업비 30억원도 반영되지 않았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복지와 배려예산이 사라진 배경으로 졸속처리를 꼽고 있다. 예결특위 계수조정 감액심사까지 비교적 정상적인 처리과정을 거쳤지만 마지막 절차인 증액심사를 앞두고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강행처리 방침이 정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나라당 소속 이주영 예결특위 위원장과 이종구 간사, 몇몇 계수조정위원과 기획재정부 핵심 관계자만 참석한 `밀실회의`는 불과 몇 시간만에 종결됐다. 핵심예산에 대한 교차점검도 이뤄지지 못했다.

한나라당 한 의원 조차도 “지금까지 예산심사를 여러 차례 봐 왔지만 올해 같은 난장판은 처음”이라며 “예산이 뒤죽박죽 됐다”고 털어놨다.

반면 여당 실세들은 철저하게 자기 몫을 챙겼다. 이 대통령의 ‘형님’ 이상득 전 부의장은 포항 몫으로 1430억원을 가져갔고, 이주영 예결특위 위원장은 430억원, 박희태 국회의장은 182억원을 챙겼다. 예산 졸속처리 문제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불교계의 반발이 심상찮다. 조계종은 9일 총무원 명의의 성명을 통해 현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했으며 자승 총무원장은 여당 정치인과의 접촉 자체를 금지했다. 9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급히 조계종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템플스테이 지원예산은 최근 개신교계가 공개적으로 삭감을 요구한 것이어서 `종교갈등`으로 번질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허리잘린 복지예산과 크게 늘어난 실세예산이 대비되면서 국민적 비판도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형님 예산’에 부담 가중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놓고 비판론과 자성론이 쏟아지고 있다. 당 지도부는 당초 정기국회 내 예산안 처리라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와 템플스테이 지원 등 중점 사업 예산 누락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 내 경제통인 이한구 의원은 증액 예산을 충분히 반영할 시간적 여유도 없는 사이에 ‘형님 예산’만 챙긴 것처럼 알려지자 다른 지역구 의원들이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며 ”서민복지 예산은 빠뜨리고 실세 예산만 챙긴 것으로 비친 것은 한나라당에게는 엄청난 악재“라고 우려했다.

이 같은 우려는 당 지도부에서도 터져 나왔다. 친이계의 정두언 최고위원은 “(실세들이) 솔선수범하고 희생해야 하지만 결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얘기했으면 선공후사를 해야 하는데 이번 상황은 선사후공의 대표적 사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박계의 서병수 최고위원도 “일반 의원들의 볼멘소리가 많은 것 같다”면서 “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을 반영하기 위해 쪽지를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위원들에게 건넸지만 계수소위 위원들이 (실세들의 예산 등) 큰 것만 챙기면서 이 같은 상황이 생긴 것 같다”고 꼬집었다.

강행 처리 과정에서 불거진 예산 부실 심사와 당 지도부의 실무자 문책론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여당의 한 당직자는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인 포항 예산이 늘어난 데에는 불가피한 요인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비판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면서 “형님 예산은 챙기고 민생 예산은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론이 나오는 것은 여권에 엄청남 부담”이라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들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므로 실세 의원이 더 예산을 챙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게이트키퍼’만 잘못(?)

개혁 성향의 초선 모임인 ‘민본21’의 공동간사를 맡고 있는 김세연 의원 역시 “예산안을 서둘러 처리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해 꼭 처리해야 할 사업이 누락된 것”이라며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니다”고 말했다.

홍정욱 의원도 “예산안 단독 처리로 인해 국민의 거부감과 실망감이 엄청나다”면서 “한나라당 구성원 모두가 반성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청와대와 정부를 향한 직격탄도 쏟아졌다. 정 최고위원은 “현정부는 과거 정부와는 달리 민심을 외면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결국 나중에는 여당이 부담을 다 안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한구 의원도 실세 예산 챙기기와 관련 “애꿎은 실무자가 알아서 챙겼다기 보다는 결국 청와대 등이 챙긴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책임을 따진다면 소재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폭풍이 심상치 않자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도 긴급 수습에 나섰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순방을 마치고 11일 오전 귀국한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등 여당 지도부와 청와대에서 비공개 만찬 회동을 갖고 수습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안 대표와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이 다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는 쪽으로 정리됐다.

고 의장은 12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템플스테이 예산 등 꼭 반영해야 할 예산들이 빠진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가책 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게이트키퍼’로서 제가 역할을 소홀히 했다”고 의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어 “예산안 문제로 당이나 정부에 대한 책임소재 논의는 더 이상 안 나왔으면 한다. 제 사퇴로 이 문제가 일단락되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될 것으로 본다”고 사태 진화에 나섰다.

문전박대 당한 ‘특임장관’

당청 수뇌부는 고 의장 사퇴와 함께 예산 주무 장관인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예산 처리 과정의 실책에 대해 한나라당에 유감을 표시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은 고 의장의 사퇴에 이어 다각적인 추가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고 의장의 사퇴로 한나라당이 일단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만큼 더 이상의 정치적 공방을 자제하고 미처 반영되지 못한 예산을 보완하는 등 수습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권이 이례적으로 발 빠르게 주요 당직자 사퇴 카드를 낸 것은 예산안 단독 처리 이후 템플스테이 예산이 줄어든 데 대한 불교계의 반발이 거센 데다 일부 서민예산의 증액분이 누락된 데 대한 야당의 공세가 거세지는 것을 심각히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 전현희 원내대변인은 한나라당 고 의장의 사퇴에 대해 “꼬리만 자른 격”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12일 예산안 사태와 관련해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사과, 예산안을 직권상정한 박희태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또 민주당은 “내년도 예산안과 쟁점법안에 대해 각각 수정안과 대체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며 대여 압박수위를 높여가기로 했다.

한편 이재오 특임장관이 12일 한나라당의 예산안 단독처리에 항의하며 서울광장에서 농성 중인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만나려 찾아갔으나 거부당했다. 야당은 이 장관이 ‘예산안 날치기’의 막후 조종자라고 보고 있다.

이 장관은 최근 민주당측에 사전연락 없이 농성장을 찾았다. 천막 안쪽에선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야당 대표들 간 간담회가 진행 중이었다.

손 대표는 이 장관의 방문 소식을 듣고 “4대강 예산과 법안들을 날치기하고 무슨 낯으로 오나. 4대강 예산을 삭감하고 날치기 법안을 파기하고 오라”고 말했다고 차영 대변인이 전했다.

민주당은 이미 ‘2011년 예산안 날치기 의결 무효화 및 수정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천막 농성이 끝나는 대로 전국을 돌며 서명운동과 결의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날치기 5인방인 박 국회의장과 정의화 부의장,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김무성 원내대표, 이주영 예결위원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펼치고 있다.

여당의 예산안 강행 처리로 급격하게 얼어붙은 연말 정국이 어떻게 귀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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