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민심 부글부글, 이참에 다 개편해야”

‘예산안 강행처리’ 이후 한나라당 분위기가 발칵 뒤집혔다.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지도부 책임론은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당사자이기도 한 안상수 원내대표가 “더 이상 당․정 문책은 없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지만 공세의 화살은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기획재정부, 그리고 청와대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정치권 일각에선 고 정책위의장 이후에도 또 다른 희생양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이 연말 정국에서 예산안 문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내년도 국정운영에도 상당한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이를 놓고 또 다른 살생부 리스트가 나오는 것도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회에서 예산이 처리되는 데 애써줘서 고맙다. 수고했다.”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 과정에서 강기정 민주당 의원과 주먹다짐을 벌여 논란이 됐던 김성회 한나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처리 직후 격려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여당의 일방독주 뒤엔 청와대의 강력한 의중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 예산안 처리는 적지 않은 후유증을 드러내며 여권 심장부에 ‘자승자박’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고 정책위의장의 사퇴로 수그러드나 했지만 야당의 거센 발발과 민심 이반이 확인되면서 지도부의 주름이 깊어지고 있다. 안 원내대표가 “더 이상 문책론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른바 ‘보온병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터라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분위기다. 이군현 원내 수석부대표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당 대표를 흔들기보다 호시우행이 필요하다”며 신중을 당부했다.

친박도 ‘조정 필요’

하지만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청와대 회동 이후 ‘밀월 시기’가 이어졌던 당 내부엔 새로운 분열의 먹구름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지도부 책임론과 조기 수습론 사이에서 또 다른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놓고 갈등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도 이 의원과 박희태 국회의장 등을 ‘날치기’ 주범으로 지목하며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어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다.

내부에선 비주류인 홍준표 최고위원이 강력한 처방전을 요구하고 있다. 홍 위원은 “지금 땜질 처방으론 정국 주도권을 확보할 수 없다”며 안 대표 등을 강하게 압박했다. 당내 경제통인 이한구 의원도 “예산처리의 책임자는 원내대표지만 그 동안의 불만이 같이 터져 나온다면 책이질 사람은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소장파 의원인 남경필 의원도 “당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며 “조만간 모여 현 상황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책임론을 시사했다.

민주당은 일단 총공세의 표적을 이 의원에게 집중하며 정계은퇴를 촉구하는 등 장외 투쟁을 본격화했다. 전병헌 정책위의장은 이와 관련 “형님 예산은 16개 사업 3665억원인데 총 사업비 규모는 9조9676억원”이라며 “이 중엔 타당성이 의심되는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도 있다”고 말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도 “모든 국정의 만사형통으로 통하는 형님께서 의원직을 사퇴하고 물러나야 한다”며 거들었다.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를 중심으로 인천 대전 부산 대구 등 전국을 돌며 장외투쟁에 들어갔다.

“어린애 같은 대표”

이에 대해 이 의원은 “형님 예산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나왔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박 의장도 민주당의 징계 및 사퇴 촉구 결의안 소식과 ‘바지 의장’ 비난에 입을 굳게 다문 것으로 전해진다.

‘날치기 처리’ 이후 민심 악화가 가속화되고 있어 현재로서 추가 인책 가능성은 완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 위원 등 당 내 일각에선 이 참에 정부와 여당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대체로 지역색이 옅은 수도권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가 깊다.

수도권 관계자는 “이번 사태로 안상수 리더십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건 사실 아니냐”며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지금 민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폭발 일보 직전”이라며 “이 상황은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내년 정국의 주도권도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상황의 해결 역시 박 전 대표가 쥐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친이계와 ‘밀월 관계’를 당분간 유지해온 박 전 대표는 이번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도 특별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박 전 대표측 관계자는 “당 지도부와 대통령이 계신데 일일이 이야기를 하면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친박계의 대변인격인 이혜훈 의원이 “예산안을 이대로 강행하긴 어렵다”며 “예산처리에 여러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여야가 생각이 비슷할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친박 내부에서 이런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안 대표의 리더십은 더욱 위기에 처할 수 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갈릴리교회목사는 최근 한 방송에서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어린애 같아서 참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정책위의장 사퇴한 것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은 어쩌면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을 수밖에 없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예산안 강행처리의 후폭풍이 어디까지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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