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700원, 2800원 그리고 3500원



며칠 전 다녀간 누이가 “반찬이 이게 뭐냐”고 금세 통곡이라도 할 듯한 표정으로 있는 짜증 없는 짜증에 온갖 창의적인 구박으로 나를 괴롭히더니 고등어며 쇠고기며 별별 것들을 기어이 보내왔다. 1식 2찬 내지 3찬을 오랜 세월 고수해온 오라비의 식습관을 모르는 바 아니면서도 굳이 그렇게 ‘승질자랑’을 해야만 했던 누이의 심사를 나 또한 모르는 바 아니어서 그저 피식피식 웃고나 말았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제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 어려워진 어머니는 사실 함께 살고 있는 나로서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참이었다. 날마다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으로서 그나마 공부를 한다고 자위하는 ‘아들자식’의 마음이 이 정도인데 멀리서 찾아온 ‘딸년’의 속내야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친정엄마…혀에 가만히 그 단어를 올려놓기만 해도 갈빗대가 시큰거리고 가슴에서는 천둥 번개에 눈보라가 몰아친다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렇게 돌아간 뒤에도 아마 선 채로 오줌을 벌벌 싸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리고 있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어머니를 모셔갈 수도 없는 처지이고 보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기도 했을 터이다. 그렇게 ‘미치겠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장을 보고, 그리고 역시 정신없이 주소를 적어서 택배 발송을 했을 터이다.
이런 ‘정신 나간’ 과소비 짓으로나마 누이의 슬픈 가슴이 눈곱만큼이라도 진정이 되었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마는, 어쨌든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큰일을 만난 셈이었다. 십 년도 훨씬 넘은 냉장고 냉동실에 누이가 보내온 것들을 차곡차곡 쟁인다고 쟁여보지만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돌겠네, 정말. 이것을 어떻게 하라고?”



혼자 소리를 꽥꽥 질러대다가 우두커니 선 채로 아무 생각도 없는 생각에 빠져 들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결국 며칠 동안 과식을 하자는 쪽으로 일단 가닥을 잡았다. 신기하게도 누이가 보내온 그것들을 누구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에 다섯 끼니 아니 열다섯 끼니를 먹더라도 그것은 오직 어머니와 나 그렇게 단 둘이서만 해결을 봐야하는 그 무슨 거대한 과업처럼 여겨지던 것이었다.
그런데 보내온 것이 온통 고기 종류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기나 생선을 통째로 삶거나 굽거나 혹은 생으로 먹기도 한다지만 내게는 그런 비위가 없었다. 어머니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머니의 입이나 내 입이나 음식이란 모름지기 이것저것 섞여 있어야만 한다는 오랜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런 맛 저런 맛 온갖 맛들이 섞여서 빚어내는 또 하나의 맛이 아니면 음식이 아니라 그냥 쇠고기요 고등어요 돼지고기 따위들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가게 되었다. 누이가 보내온 쇠고기를 요리해 먹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 고등어를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가야만 하는 내 마음은 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니 사는 동안 무엇을 얼마나 그렇게도 장한 일을 많이 한다고 이것저것 온갖 생명들을 잡아서 먹다가 남아서 버리는 짓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나름대로 오랜 세월 만지작거려 온 나로서는 뭐라고나 할까, 마치 바위를 산꼭대기로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에 처한 사내와 같은 어떤 함정에 빠져 버렸다는 꼭 그런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장을 보러 갔다. 자전거가 고장이 나서 커다란 등산용 가방을 등에 지고 천변을 터덜터덜 걸어 면소재지에 달랑 하나 있는 ‘주부마트’라는 이름의 작은 식재료 가게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순간 고등어는 역시 무를 넣고 졸여야 제 맛이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무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놀라워라. 무가 한 개에 3500원이란다. 겨우내 저장을 하는 수고를 거친 뒤에 나온 봄 무도 아니고 이제 막 제철을 맞이한 무가 두 개도 아닌 달랑 한 개에 3500원이란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고나 할까. 채소 값 폭등으로 도시 주부들의 비명이 굉장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아직 체험을 못해본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서 비싸다는 말도 해볼 수 없었다.



무 한 개에 3500원이라는 현실 앞에서 놀라고 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니 내 손으로 배추나 무를 사본 지가 언제인지 아득하다. 서울 생활 청산하고 고창으로 내려온 뒤로 무나 배추를 돈 내고 사본 적이 없었다.
양파나 쪽파 혹은 마늘이나 당근 같은 것들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품종이 아니어서 부득이 돈을 주고 사야 했지만, 배추나 무는 농촌에서 밭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텃밭농사였다. 때문에 가는 길에 혹은 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나 한두 개 얻어올 수 있었고, 아니면 수확이 끝난 뒤의 아무 데나 밭에 들어가서 남은 것들을 걷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밭뙈기 장사 옥말임 씨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아예 그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 왔다. 옥말임 씨가 고창에 있는 동안에는 배추나 무 같은 것들을 늘 차에 싣고 다니면서 지나는 길에 내려놓곤 했다. 그런 세월이 5년을 넘어 거의 6년이었다. 
빚을 산처럼 안고 종적을 감춰버린 옥말임 씨가 지난 오륙 년 동안 내게 넣어준 지식에 따르자면 3500원짜리 무 한 개의 ‘기본 원가’는 아마 700원도 채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 원가’란 농부의 손에 들어가는 금액을 말함이다. 농산물 특히 밭뙈기 장사가 개입하는 채소류의 경우 원가 산정이 매우 애매하거나 혹은 그 방식이 복잡해서 ‘기본 원가’라는 개념을 도입해야만 말이 된다.




‘기본 원가’는 농자재 가격의 변동 추이에 따라 매년 달라지기는 하지만 농부들이 밭뙈기 장사들로부터 받는 돈은 별 차이가 없다. 3년 전이나 2년 전이나 금년이나 농부들의 수입은 거의 같거나 아니면 폭락 사태로 잔금을 못 받아 속이 까맣게 타버리는 있어도 떼돈을 버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시장 가격이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내다볼 수 있을 정도의 예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농민들도 가끔 떼돈이라는 것을 벌어볼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농민들이 밭뙈기 장사들에게 작물을 넘기는 시기가 대체로 씨앗을 뿌린 뒤로 열흘 이내거나 늦어도 속잎이 두세 장 정도 나올 무렵이다. 요컨대 밭뙈기 장사들은 씨앗의 발아 상태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해서 사 들이는 것이다.
항상 돈에 궁핍을 느끼는 농민들은 다른 작물과는 달리 씨앗을 뿌려서 싹이 나오자마자 처분하고 계약금으로 몫돈을 만질 수 있으니 서로가 먼저 밭뙈기 장사들의 눈에 들려고 노력을 한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애써 지은 농사를 헐값에 미리 넘겨 버리느냐고 충고를 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속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계약금으로 받은 몫돈이래봐야 사실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것이라도 없으면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농사꾼의 삶은 더욱 척박해진다. 가격이 폭락해서 채소가 하나도 안 팔리면 밭뙈기 장사에게 넘겼을 경우 잔금을 떼이는 정도로만 망하지만 넘기지 않았을 경우는 완전히 망해 버리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밭뙈기 장사들과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농민들은 장사를 못 한다. 허리 구부리고 앉아서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아내며 하루하루 자라는 작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씽긋씽긋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을 줄은 알아도 그것을 돈 받고 팔아먹는 재주는 없다.



게다가 채소는 신선식품이라 일정 기간 안에 처분을 해야지 안 그러면 죄다 썩어 버린다. 일정 기간 안에 처분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많은 돈을 들여 인부를 대량 고용해서 도시로 내보내야 하는데 농민들에게는 그런 돈이 없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해도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정보가 없는 까닭에 더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농민들에게 있어 밭뙈기 장사는 ‘미워할 수 없는 당신’인 셈이다.
또 하나, 농민과 밭뙈기 장사의 관계는 노조가 없는 기업과도 같다. 농민은 땅을 갈아서 씨앗을 뿌리기만 할 뿐 그것을 얼마에 팔겠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얼마를 달라고 요구할 권한도 없다. 밭뙈기 장사가 찾아와서 ‘이거 얼마’하면 그대로 응하거나 좀 더 달라고 우는 소리를 낼 수는 있어도 매몰차게 안 판다고 돌아설 수는 없다.
가끔 젊은 농부들이 이것저것 깐깐하게 따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람은 십중팔구 그 해의 채소를 처분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다가 썩혀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밭뙈기 장사들의 네트워크가 위력을 발휘해서 그 사람의 물건을 썩히기로 결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를 가나 밭뙈기 장사들이 찾아드는 다방이 있고 식당이 있고 화물 알선소가 있는데 여기에서 정보교환이 이루어진다. 어느 동네 어떤 사람이 어디에 배추씨를 몇천 평 뿌렸는데 그 사람이 어떻다거니 저떻다거니, 그 밭이 좋다거니 나쁘다거니 등등 평가가 이루어지고 나아가서는 가격 상한선까지 정해져 버린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해도 전화를 통해 정보는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면 밭뙈기 장사들은 씨앗이 발아하자마자 사들인 작물들을 어떻게 할까. 일단 작업반장을 두고 주기적으로 관리를 하도록 한다. 그런 한편 밭뙈기 장사들 상호간에 팔고 사기를 되풀이 한다. 씨앗이 발아하면서 출하시까지 약 3개월 동안 팔고 사기를 되풀이 하는 동안 가격은 점점 올라간다.



밭뙈기 장사의 특징을 들자면 아무래도 그 두툼한 배짱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시중 가격이 일단 오름새를 탔다 하면 밭뙈기 장사들은 물건을 죄다 수확해서 저온창고에 저장해 버린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어제는 너, 오늘은 나, 그리고 내일은 그, 하는 식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풀어서 소비자들의 애를 바싹바싹 태워놓는다.
이른바 상도덕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는 사회라면 가격이 너무 오른다 싶을 때 물건을 풀어서 소비자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정착된 사회체제 하에서는 상도덕에 앞서는 것이 자본의 논리인지라 사람보다는 돈을 우선시하게 되는 장사, 이게 아마 밭뙈기 장사의 최대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고등어조림을 해 먹으려고 오랜만에 3500원씩이나 퍼주고 산 무 한 개에는 농민의 피와 땀이 고작 700원어치 들어 있는 반면 자본이 주장하는 무한증식의 논리에 의해 형성된 2800원이 부가로 붙어 있었던 셈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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