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로 공 넘어간 ‘과학벨트 논란’

충청권 민심이 들끓고 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약칭 과학벨트) 충청권 사수를 위한 지역 단체와 야당의 움직임도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분위기다. 민주당 충북․충남․대전 공동투쟁위원회는 지난 3일 청와대 상경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과학벨트 충청권 설치가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하며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권 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여당 내에서도 청와대의 지시에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과학벨트의 향방은 대선 때마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던 충청권 민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는 두 개의 벨트가 있다. 하나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휴전선이고 도 하나는 한반도를 동서남북으로 사분오열하는 과학벨트다.”

야당 정치인의 말이 아니다. 김호연 한나라당 의원(충남 천안을)은 최근 대정부 질문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과학벨트 공약 백지화를 강력히 비난했다. 김 의원은 이어 “과학벨트는 한나라당의 제18대 총선 공약이고 정부 평가에서도 최적지”라며 “당연히 충청권으로 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동안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자제해왔던 박근혜 전 대표조차도 “대통령이 책임질 것”이라며 청와대에 비수를 꽂을 정도였다.

“충청도 표 얻으려고…”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과학벨트’의 충청권 유치 공약을 수차례 약속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복합도시 이전 추진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론 표를 얻기 위한 승부수 중 하나였다.

그랬던 이 대통령은 지난달 초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과학벨트의 충청권 유지는 표를 얻으려는 의도였다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백지상태에서 입지를 선정하게 될 것이라고 기존 공약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이 대통령은 ‘과학벨트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제2의 세종시가 된다는 걱정도 있다’는 질문에 “선거 유세에선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다”며 “하지만 이것은 국가의 백년 대계이니 공정하게 과학자들이 모여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공약 파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이 대통령이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남발했다는 사실에 충청권의 민심은 벌집 쑤신 듯 혼란스러워졌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도 이런 일은 볼 수 없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야당 등 정치권도 청와대의 갈지자 행보에 불협화음을 드러냈다. 민주당 대전시당은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의 공약파기는 대 충청권 사기 행위”라며 “표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판 이 대통령을 충청인은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몰아붙였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도 “이게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의 말인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렇게 눈 뜨고 뻔한 사실을 뒤집고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다”고 맹비난했다.

지역 한나라당 관계자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내년 총선은 이미 끝났다는 절망감까지 흘러나온다. 윤석만 대전시당위원장은 “이 대통령이 대선 기간 수차례에 걸쳐 약속한 사업이 과학벨트”라며 “공약이 지켜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반기’를 선언했다.

“일종의 사기결혼”

성난 지역 민심은 지난달 말 대정부 질문을 시작한 국회에서도 재현됐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충청권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박병석 민주당 의원(대전 서구 갑)은 이 대통령의 번복에 대해 “이것은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니까 결혼해 주시오’ 그래서 결혼을 했더니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이 탐났다’하는 격이다. 사기 결혼과 무엇이 다르냐”고 책임론을 제기했다.

임영호 자유선진당 의원(대전 동구)은 “탄핵사유에 해당한다”며 “향후 정치적 책임은 물론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공을 국회로 떠넘김으로써 과학벨트는 임시국회 상임위로 넘어왔다. 이미 이 대통령의 공약 백지화 발언으로 민주당 내 호남 의원들이 지역별 유치에 나서는 등 상황은 대혼돈속으로 빠져든 상태다.

관련 법안에 ‘충청권’을 명기한다는 게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의 공식 입장이지만 지역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탁상곤론’만 하다 끝날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표와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 차기 대선주자들이 ‘충청권’ 민심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다. 청와대가 날린 공수표에 정치권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관심이 모아진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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