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공수표만 남발한 에리카 김 사건

‘BBK 사건’의 키를 쥔 에리카 김씨가 지난 달 말 돌연 입국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귀국한 것이다. 야권에선 ‘기획귀국설’을 주장하며 여권 핵심부와의 공모 가능성을 문제 삼았지만 검찰 수사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끝날 것이라는 게 정가의 대체적인 예상이었고 실제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돼가고 있는 형국이다.

BBK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당시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사안이다. 에리카 김씨의 동생 김경준씨가 이로 인해 법적 처벌을 받고 있지만 관련 의혹들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에리카 김의 귀국과 검찰 조사가 BBK의 의혹들을 씻겨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에리카 김씨와 그가 각별히 여기는 동생 김경준 씨가 다시 만났다.

하지만 만남 장소는 과거 미국 시절과 달리 유쾌하지는 않다. ‘BBK 주가조작 횡령’ 의혹 등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은 지난 9일 검찰에 재소환 돼 대질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이들 남매를 상대로 2001년 창업투자회사 옵셔널벤처스의 회삿돈 319억원을 빼돌리는데 공모했는지 여부 등을 집중 조사했다. 특히 남매간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대질조사도 진행했다.

이들은 2001년 7월부터 10월까지 외국계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외국자본이 옵셔널벤처스(옛 BBK투자자문) 유상증자에 참여할 것처럼 허위공시해 주가를 조작하고, 회삿돈 319억원을 투자자들에 대한 투자금 반환 명목으로 빼돌린 혐의(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를 받고 있다.

각별했던 남매의 재회

두 사람은 또 2007년 대선 때 ‘BBK의 실소유주인 이명박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이 BBK 주식 100%를 관련 회사인 LKe뱅크에 매각한다’는 내용의 이면계약서를 위조해 검찰에 제출하고 이를 폭로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도 받고 있다.

한 때 에리카 김 씨와 이 대통령은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4년 이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미국 LA의 한인교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10여년간 좋은 관계가 지속됐다고 한다.

에리카 김씨와 동생 김경준씨는 미국 한인 사회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BBK 사업으로 함께 추락했고, 이 대통령과의 관계도 돌아오기 힘든 다리를 건넜다.

이 대통령과 김경준씨는 2000년 초 BBK의 지주회사 격인 LKe뱅크를 설립했으며 당시 이 대통령은 지인들을 통해 회사 투자금을 모아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BBK 의혹이 핵심 쟁점으로 떠 오르자 “아무 관련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인했다. 관계가 있으면 대통령에 당선돼도 직을 걸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선을 한달 앞두고 김경준씨가 강제송환됐다. 인감도장과 서류 위조 등을 놓고 논란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김경준씨의 진술 번복으로 사태는 급반전됐고 이는 검찰의 ‘기획 수사’ 의혹으로 번졌다. ‘김경준씨 메모 사건’과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는 이 대통령의 동영상 화면은 당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이후 이 대통령은 대선에서 당선됐고 김경준씨는 법적 처벌을 받았다.

‘진퇴양난’ 빠진 검찰

에리카 김씨는 지금까지만 보면 동생과 함께 BBK 사건의 공범이었다. 검찰은 에리카 김씨를 이 대통령 회사인 것처럼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했다가 귀국에 응하지 않자 기소를 중지했었다.

그런 그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여기서 상황을 정리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경준씨의 고생이 컸던 만큼 BBK 문제를 정리하는 대신 동생을 미국으로 데리고 갈 것이란 얘기도 회자된다.

‘자진입국’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에리카 김씨와 여권 인사들이 미국서 사전 접촉했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민주당 등 야권에선 “이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기획 입국”이라며 한목소리로 질타했다.

민주당 내 대표적인 ‘BBK 저격수’인 박영선 의원은 “검찰이 에리카김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왜 구속을 못하고 있는지 입장을 발표해야 한다”며 “편지조작 사건과 에리카김의 입국으로 검찰이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에리카 김 씨가 동생 김경준(45) 씨가 대표로 있던 옵셔널벤처스 코리아(현 옵셔널캐피탈)의 회사 돈 횡령과 주가조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하지만 검찰 일각에선 동생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점을 들어 누나를 불기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BBK 논란은 장기화될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옵셔널캐피탈은 에리카 김 씨가 2001년 5월부터 1년간 옵셔널벤처스 코리아의 이사였고 한달에 4000달러의 자문비를 받았다며 횡령 과정에서 누나도 상당 부분 관여했다는 입장이다.

옵셔널캐피탈의 미국 측 대리인인 메리 리 변호사도 “횡령과 주가조작의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에리카 김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검찰이 이를 받아들여 불기소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진실 규명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라당 인사 조작 강요”

때문에 검찰이 김경준 씨에게 이미 선고된 중형 등을 이유로 에리카 김씨를 기소하지 않을 경우 논란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BBK 문제가 정국 현안으로 장기화될 경우 청와대와 여권으로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편지 조작건도 의외로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이 대선 직전인 2007년 11월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 후보를 흠집 낼 목적으로 김씨를 기획입국시켰다”고 주장하며 언론에 공개한 편지는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지만 검찰은 무혐의로 내사 종결했다.

하지만 편지 작성자인 신명 씨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나라당 측 인사가 조작을 강요했다”고 폭로함으로써 검찰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민주당은 BBK사건의 폭발력이 정권 후반기 레임덕과 맞물리며 의외로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해 신속하게 전담팀을 만들며 ‘전투 의지’를 다지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BBK 김경준 검찰 수사 대책반’ 가동을 지시했고 박영선 의원이 단장이 됐다. 우윤근, 양승조 의원을 비롯 최재천, 정봉주, 서해석 전 의원 등 원외 의원들이 포진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와 관련 “김경준 기획입국설의 증거가 된 편지가 사주에 의해 잘못 제출됐고 검찰도 당시 그것을 인정했다면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에 재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 제안자는 이 대통령의 가족이고 최측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사건을 진두지휘했다는 사람도 친이 핵심 인물”이라며 “누구인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대선 후 여야가 고소, 고발건을 모두 취하함에 따라 사건이 종결됐다”며 소극적이었던 검찰로선 난처해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검찰은 에리카 김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릴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소시효 만료가 그 이유로 알려지고 있다.

에리카 김 씨의 귀국은 당초 여권 인사와의 ‘교감’을 통한 기획귀국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다시 진상규명이란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BBK의 유령은 여전히 정권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진석 기자 ojs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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