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24 - 북촌 한옥 마을 2 : 윤보선 가옥 등 역사 명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윤보선 생가 등 역사 명소를 중심으로 북촌 한옥마을을 둘러봤습니다.


# 헌법재판소 내에 위치한 수령 600년 된 백송

북촌 한옥 마을을 돌아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사 명소를 중심으로 하루를 보내면 교육 현장으로서도 유익하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 오래 전부터 권문세가와 양반들이 모여 살았고 각종 관청들도 삼삼오오 빼곡하게 배치됐다. 홍선대원군의 운현궁 등 왕족들이 살았던 저택과 조선 왕실의 위패를 모신 종묘도 인근에 있다.
안국역에서 큰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얼마가지 않아 헌법재판소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이 곳에 천연기념물 제8호인 재동 백송이 있다. 이 곳은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박규수의 집과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광혜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백송 수령은 약 600년 정도이며 높이 15미터, 면적 230제곱미터다. 밖에서도 관람이 가능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정문 안내소에서 방문증을 신청하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 공원처럼 아늑한 헌법재판소 내 휴식터

조선시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으로 알려진 재송 백송은 통의동 백송이 죽은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 됐다.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진 V자 모양으로 하고 있으며 수피가 비늘처럼 벗겨져 얼룩 모양처럼 보인다. 백송 뒤로 보이는 담장 너머에 윤보선 가옥이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식 휴식처도 평안함을 준다.


# 한 때 야당의 회의 장소였던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

여운형, 김성수 ‘활동지’

헌법재판소를 나와 골목을 돌아가면 윤보선길 표지판이 보인다. 초입에 ‘조선어학회터’ 표지판이 있다. 이 곳이 근대화와 일제 시기 문화의 중심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비개방인 안국동 윤보선가(사적 제438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단임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거주했던 집이다.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칸 한옥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사랑채, 산정채, 별당 등이 남아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야당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등 1960-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요람이었다.


# 중앙 중고등학교 정문


# 원서동 백홍범 가옥


가옥은 187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양의 영향을 받은 정원과 실생활에 맞게 개조된 안채, 서양식 차양 등 한옥과 양옥이 두루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담장 안으로 보이는 농구골대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시 큰 길을 건너 재동초등학교 쪽으로 들어선다. 학교 정문 옆 일제시대 민족문화 수호에 앞장섰던 ‘진단학회’ 터 표지판이 보인다. 언덕길을 올라가다보면 여운형 집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 인촌 김성수 선생 가옥


# 위에서 본 풍경


김성수 옛집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 거주하던 고택이다. 북촌문화센터 맞은 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봉산재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2?8 독립선언을 위해 항일 독립투사들이 모인 밀회의 장소이자 민주화 운동을 위해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진 장소라고 한다.
선생은 1918년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를 인수해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1919년 경성방직횟를 설립해 민족자본 육성에 힘썼다. 1920년엔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1932년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를 인수했다. 하지만 이후의 행보를 놓고선 ‘친일’ 논란도 적지 않다.


# 관상감 관천대


# 종친부의 경근당과 옥첩당


# ‘조선어학회’ 터


# 여운형 집 터 표지석

중앙 중?고등학교(사적 제 281?282호)는 유럽의 건축양식이 깃든 이국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 숙직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에게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해 교주 김성수와 함께 3?1 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학교엔 당시의 숙직실이 그대로 복원돼 있다.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학교 수업 관계로 주말에만 관광객들에게 개방된다.
학교 내 인문학박물관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설립됐다. 한국 근?현대사를 반영한 인문학 도서와 유물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학습장이다. 이곳 계동길 인근은 배렴 가옥 등 게스트하우스가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 계동 배렴 가옥

왕족 문제 논의 ‘종친부’

원서동 백홍범 가옥(시도민속자료 제13호)은 안채의 별채였던 건물로 ‘ㄱ’자형 평면으로 구성돼 있으며 안채 자리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자리한다. 상궁이 대궐을 나왔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장희빈의 집터로도 알려져 있다. 1910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한옥은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변화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 한쪽엔 창덕궁 비원과 이어지는 대문이 보인다.


# 한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방문객을 기다리는 문지기견

창덕궁 담장길을 따라 큰 길로 내려오면 계동 현대 사옥 앞에서 또 하나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관상감 관천대(사적 제296호)는 조선시대에 달?별의 움직임과 일식, 월식을 관찰하는 한편 벼락, 비, 눈, 서리, 이슬, 지진 등을 관측했던 시설이다. 세종 16년 이 곳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설치됐으나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복원할 때 원래 위치였던 땅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평지보다 조금 높게 쌓았다.
항상 차들로 붐비는 안국동 길을 따라 정독도서관에서 일정을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자. 정독도서관 내엔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시도유형문화재 제9호)이 있다. 1433년(세종 15)에 세워진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들의 족보와 용안을 그린 명정을 받들고, 국왕 친지들에게 품계와 벼슬을 주는 인사문제, 이들 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도서관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고풍스럽다. 이곳은 또한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의 생가가 있던 곳이며 화기도감 터였다. 입구 쪽엔 동아일보 사옥 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20년 4월 ‘민족언론’을 표방한 동아일보가 이곳에서 그 첫 발걸음을 뗐는데 김성수 생가가 인근에 있음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북촌 한옥마을 인근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와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한옥에 깃들인 깊은 맛과 함께 우리 민족의 아픔과 긍지를 동시에 느껴보는 것도 추위가 풀리는 2월의 하루 일정으로 손색이 없을 듯싶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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