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25 - 조계사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우리나라 도심의 큰 절이자 조계종 본산인 조계사와 그 인근을 둘러봤습니다.


# 서울 도심에 위치한 조계사

일에 쫓기고, 사람들에게 치이고, 주머니는 갈수록 가벼워지고….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진다. 잠시라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새소리라도 듣고 싶어진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가득 찬 도심에서 이런 여유와 풍요를 누리는 건 쉽지 않다. 그럴 땐 종교와 상관없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조계사로 발걸음을 옮기면 어떨까.
멀게만 느껴지는 사찰이지만 실은 종로와 광화문, 명동과 시청 등 도심 중심에서 10분~30분 정도만 걸으면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 조계사 정문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조계종의 본산

한국 불교의 중심인 조계사는 1910년 창건된 각황사에서 시작됐다. 조선 왕조가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 시기 불교는 점차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들어 세워진 각황사는 원흥사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사무소를 옮겨와 한국 근대 불교의 새 운동을 이어갔던 중심지다.


# 1층 단일건물로는 최대라는 ‘대웅전

당시 일본 총독부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사찰령을 선포하며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을 그제의 일본사원인 장충단 박문사에 귀속시키려 했다. 민족불교 확립과 국권 회복에 뜻을 같이한 전국의 승려들과 신도들은 뜻을 모아 이에 반발했다.
이에 당시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그리고 만해 한용운 등이 31본산 주지 회의를 열었다. 이 때 만해는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통해 조선불교의 통일기반인 총본산제도를 주창했다.
뒤이어 1929년 전국에서 모인 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을 제정했으며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엔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해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대웅전은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십일전을 이전해 개축했다.
1941년 조선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불교 조계종이 시작됐고 제1대 종정에 한암스님이 취임했다. 이후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태고사는 조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 500년 수령의 백송과 450년 추정의 회화나무

염주모양의 열매 ‘회화나무’

종로에서 조계사로 가는 길목은 이색적이다. 각종 불상과 승려복, 연등 등 불교 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도심에서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고층건물들 사이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한편으론 신기할 따름이다.
조계사 정문. 4대강과 불교 차별 문제를 놓고 정부와 사실상 전면전을 선포한 불교계의 분위기가 완연하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조계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내걸려 있다. 오른쪽 신도회관도, 길 건너 맞은편 탬플스테이 건물도 마찬가지다. 여론을 무시한 개발 위주의 밀어붙이기식 정책과 예산안 강행처리는 자비와 평화를 강조하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 극락전

정문에 내걸린 화려한 금장식을 지나면 비로소 절에 온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조계사의 중심인 대웅전 옆으로 하얀 백송이 보인다. 헌법재판소 내에 있는 백송처럼 우람하진 않지만 불전과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천연기념물 제9호인 수송동 백송은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조계사 대웅전(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27호)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단층 건물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다. 평일 오후임에도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불신도들로 가득하다.
‘대웅’이란 말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이라고 일컬은 데서 유래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팔작지붕 아래 받침부재를 겹겹이 배치해 처마를 길게 내밀었다. 웅장한 대웅전 앞으론 거대한 회화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는데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78호로 나이는 450년 정도로 추정된다. 10월에 염주모양의 열매가 열리는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나무로 불리며 궁궐과 사철, 향교에 자주 심었다. 예전 조계사 부근엔 회화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회화나무 우물골로도 불렸다고 한다.


# 이종일 선생 동상


# 보성사 기념탑


# 보성사 기념탑


#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곳


회화나무 뒤 탑 주위론 불신도들이 탑돌이를 하며 정성스럽게 기원하고 있었다.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 저와 비슷하리라. 조금씩 부는 늦겨울 바람 속에서도 불꽃을 유지하는 촛불들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대웅전 왼편으론 종과 북이 있는 ‘범종각’과 ‘극락전’이 있다.
조계사 둘러보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광화문과 인접해 있는 만큼 곳곳에 역사적인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더구나 이 곳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조계사 극락전을 돌아가면 도심에서 보기 드문 작은 공원이 나온다. 깊은 산속에 온 것처럼 작은 산새들이 하루 종일 지저귀는 곳이지만 민족혼이 강하게 살아 숨쉬는 장소기도 하다. 공원 초입에 ‘보성사 터’라는 표지가 보인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과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
중동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옛 터도 여기였다. 화가 고희동 안중식 등 예술인들도 이 곳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공원 앞엔 이종일 선생의 동상이 주먹을 불끈 쥐고 우뚝 서 있다. 당시엔 일제를, 현재는 민족혼이 사라져가는 세태를 꾸짖는 듯 하다.


# 우정총국

1904년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한 항일민족언론 ‘대한매일신보’도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공원 뒤쪽으론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곳곳에 깃들인 충절의 마음은 그 역사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명의와 화가들의 ‘산실’

산새 소리와 대나무 숲을 뒤로 하고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과 잠시 휴관중인 ‘불교박물관’을 지나면 휘어진 굵은 나무 뒤로 고풍스런 건물이 보인다. 바로 국내 우편업무가 시작된 우정총국(사적제213호)이다. 1884년 4월 신식문물을 배운 홍영식의 건의로 세워졌는데 의학교육을 담당하던 전의감의 부속건물을 수리해 세웠다. 홍영식을 비롯 김옥균 박영효 등은 같은해 12월 우정총국 개업 축하자리에서 그 유명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건물은 현재 체신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분수광장과 민영환 동상

우정총국 앞 도로엔 과거 이 자리가 궐외각사의 주요 위치였음을 보여준다.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전의감’,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 한국 회화의 요람 역할을 했던 ‘도화서’가 모두 이 근방에 있었다. 명의 허준을 비롯 김홍도, 신윤복 등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 대부분이 이곳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우정총국 뒤론 대나무들을 배경으로 민영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자결로 분노를 표시한 민영환의 집터가 조계사의 경내였다.


# 옛 조선중앙일보 사옥 

조계사에서 다시 종로로 내려오는 길, 요즘 금융기관 건물로는 다소 투박해 보이는 ‘농협 건물’도 놓치지 말자. 오래되어도 자리를 지키는 건 그만큼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926년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으로 쓰여졌던 곳이다.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의 후원 아래 몽양 여운형이 사장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 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가 1937년 폐간됐다. 2002년 서울시가 근대 건축물로 지정했다.




서울 도심의 사찰 조계사로의 나들이는 ‘불심’의 평안함과 민족정기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에 부족하지 않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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