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나 활개치는 국보법, 경악하는 대학생

현 정권 들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이번엔 대학생 학술동아리를 겨냥해 파문이 번지고 있다. 지난 21일 경찰은 ‘자본주의연구회’ 회원 3명을 체포하고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벌였다. 이들중 2명은 이틀 뒤 풀려났고, 연구회 초대회장인 최호현 씨에겐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대학생들을 비롯 시민사회 진영의 반발은 거세다. 한국대학생연합, 한국대학생문화연대 등은 “정권이 대학생들을 탄압하는 사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와 같이 음모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는 탄압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규탄했다.



레임덕이 빚어낸 ‘참사?’

지난 21일 경찰은 국보법 위반 혐의로 대학생 학술동아리 ‘자본주의연구회’ 회원 3명을 체포하고 12명 회원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3명 중 2명은 하루를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보낸 뒤 풀려났고, 자본주의 연구회 초대회장인 최호현(37) 씨에겐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체포된 회원 면회를 간 51명의 대학생들이 전원 그 자리에서 연행돼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대학생들은 면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의집회를 여는 과정에서 연행됐다. 51명의 학생들은 구로, 동작, 서대문, 성동, 수서 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들은 1박 2일을 유치장에서 보냈다.
대학 동아리를 향한 경찰의 갑작스러운 공안수사에 대해 한국대학생연합, 한국대학생문화연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생들은 경악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동시에 체포와 압수수색이 이뤄진 것은 경찰이 이것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정권이 대학생들을 탄압하는 사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와 같이 음모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는 탄압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규탄했다.




많은 대학생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고려대에 재학 중인 정모 양은 “마르크스 평전으로 세미나를 하고 자본론을 읽었다는 이유로 국보법 혐의를 적용한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혀를 찼다. 정 양은 “할아버지 세대들이 국보법으로 잡혀가던 시절이 있었던 사실은 알고 있다. 어렸을 적 TV를 통해 어떤 법인지 본 적이 있다. 김지하 시인 세대에나 있었던 일 아니냐”고 했다.  
한모 군은 “선배들을 통해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잘은 몰라도 진보적 활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돼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 지금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좀 섬뜩하기도 하다. 우리 시대엔 그런 법이 사실상 적용되지 않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동국대에 재학중인 박모 군은 “국보법?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런 법이 아직도 있었느냐”고 했다. 박 군은 “마르크스, 헤겔은 나도 안다. 학생들이 공부하느라 책 좀 본 걸 가지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편 야당들도 이번 사태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노동당 최창춘 자주통일위원장은 경찰수사의 원인을 ‘레임덕’에서 찾았다. 최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민생도 외면하고 평화도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청년 학생들이 올해 그리고 내년, 등록금 투쟁 등을 통해 저항하려는 분위기가 보인다. 이를 꺾기 위해 이러한 사건을 벌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북 지령 받은 거 아니냐 추궁해”

자본주의연구회 소개 글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대안을 찾아가는 학술 동아리”라고 적혀 있다. 국내 수십 명의 학자들이 연사로 참여하고, 6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한 대안 경제 캠프를 비롯해 많은 세미나, 토론 등을 진행해 왔다. 국보법 위반 혐의를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힘들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21일 체포돼 경찰 조사를 받고 이틀 만인 풀려난 자본주의연구회 전 회원 최일영 씨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최 씨는 “자본주의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된다”며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최 씨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NGO국제통상연구소의 정책팀장을 맡고 있다.



최 씨는 “자본주의연구회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전국 규모의 학술 동아리”라며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이 때로 정부 비판으로도 이어지니 공안기관에는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최 씨에 따르면 경찰의 수사가 자본주의연구회 활동과 북한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이 자본주의연구회가 개최한 워크숍 자료집에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의 내용이 실린 것을 토대로 연구회의 구성과 활동이 북의 지령에 따른 것 아니냐며 추궁했다는 주장이다.
“경찰이 증거라며 제시한 북한 사상에 대한 논문 등은 모두 처음 보는 자료들이었다. 경찰이 연구회 회원들에 대해 가입 혐의를 두고 있는 ‘새세대 청년 공산주의자 붉은기’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조차 없다. 증거라고 내미는 자료들이 황당했다.”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쓸까봐 겁이 났다는 최 씨는 경찰 조사 과정 내내 단식을 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최 씨는 “대학시절 한총련 대의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데, 그런 전력 때문에 저를 무리하게 수사 대상에 포함시킨 것 같다”며 “과거 보수정권이 레임덕을 피하기 위해 임기 말에 공안기관을 중심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곤 했는데, 또다시 그런 구태가 부활한 것 같아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 최일영 씨

최 씨는 “경찰이 이달 초 전담팀을 만들어 저에 대한 사진 채증과 통화 감청을 해왔다는 것을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됐다. 무섭고 당황스럽다”고 우려했다. 또 “수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걱정되고, 사생활 침해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이룰 수도 없다”고  호소했다.

처벌조항 모호한 7조 적용 논란

국가보안법 제 7조(찬양?고무 등)
①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지난 23일 경찰은 최호현 씨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가보안법 15개 처벌조항 중 논란이 가장 많은 조항이 최 씨에게 적용된 제7조 1항 찬양·고무 금지다. 이 조항은 1980년 보안법이 현재의 틀을 갖출 때 생겼다. 1990년엔 헌법재판소가 한정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제한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처벌조항임에도 너무나 모호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게 이유였다.



고무·찬양 대상이 막연히 ‘구성원’이어서 북한 어린이에게 노래를 잘한다고만 해도 ‘찬양’으로 처벌되고, 국제경기 남북단일팀 출전 제의에 찬성해도 ‘동조’로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타의 방법으로’는 구성 요건이 무제한적이어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다만 남북이 긴장상태인 점을 고려해 위헌으로 폐기하는 대신, ‘국가의 존립이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알면서’라는 전제가 있을 때만 처벌하라고 했다. 이듬해 국회는 헌재의 이 같은 결정 취지에 맞춰 보안법 7조를 개정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 역시 이에 맞춰 국보법 7조를 해석하고 있다. 지난 2월 대법원에서 찬양·고무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실천연대 사건도 이들의 활동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국보법 폐지론자들은 이 조항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19조에 위반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령 현실적으로 처벌이 필요하다고 해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처벌하는 게 맞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논리로 유엔 인권이사회도 국보법 7조의 개정과 보안법의 점진적 폐지를 권고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이 이 조항 등을 포함한 보안법의 전반적 개정과 폐지 등을 추진했지만 무산된 바 있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노무현 정권 때 국보법 철폐 못한 것이 유감이고 아쉽다. 국회도 다수였고 분위기도 충분했는데 실행을 못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법이 있으니까 경찰, 검찰 등 공안당국이 끊임없이 걸고 넘어진다”며 “공안기관이 과잉충성하려 해도 고리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구속영장이 신청된 최 씨는 별 문제 없이 풀려나오리라고 낙관한다”면서도 “공안탄압의 고리가 되는 국보법을 철폐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본주의연구회 같은 사건이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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