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모던 그리고 한 유명화가



‘모던’이라는 말에 ‘최신’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탓일까. 내겐 유독 모던이라는 단어가 갖는 과거적인 느낌이 극단적인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Modern’이라는 단어 자체도 ‘최근’이라는 재기발랄함을 버리고, 이젠 고유명사처럼 과거를 품게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당시엔 최고로 모던했을 ‘모던 타임즈’는, 제목이 부끄러울 정도로 과거의 이야기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20세기가 모던할 리 없잖은가. 한 달 걸러 새로운 스마트폰 모델이 발표되고 하루하루 새로운 시스템이 범람하는 지금 같은 때에 태엽이 돌아가는 시끄러운 공장의 이미지 같은 것은 더 이상 ‘모던함’의 표상일 수 없다.
흑백의 무성영화는 논의할 대상도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이야기 하는 ‘modern times의 문제’는 아직도 날이 번쩍번쩍하게 서있다. 마치 ‘새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배경은 분명, 근대다. 생산력만이 유일한 고려 대상이던, 인간이 노동력에 불과한 몰 인간적인 사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수정해왔다고, 그리하여 현대의 자본주의는 수정 자본주의라고, 그렇게 배워왔건만, 대체 이 흑백영화가 아직도 베일 듯 날이 서있음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가 1학년 때였던가, 하여튼 꽤 오래전 일이다. 강의 도중 교수님께서 어떤 화가분과 저녁약속이 있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마쳐야겠다고 양해를 구하셨다. 학생들은 기뻐했다.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교수님께서 “수업 듣기가 그렇게 싫으냐”하고 한 말씀 하실 정도였다. 뜻밖의 희소식(?)에 강의실 안은 꽤 술렁술렁해졌다. 분위기상, 당장 “자 다음 페이지” 하고 말씀하실 수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교수님께서는 그 화가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법학교수와 화가, 꽤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 않은가. 어떻게 친히 지내게 되었는지, 알고 지내보니 어떤 사람인지 뭐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전부터 그 화가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굉장히 유명한 한국작가다. 아마 그의 그림이 갖는 몇 가지 특징만 나열한대도, 평상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던 몇몇 사람은 내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을 거다(그래서 굉장히 조심하고 있다).
명망 있는 화가, 나는 솔직히 크게 대단하다 느낄 수 없는 그의 그림에 대해서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오히려 단순하고 늘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기에, 그의 명망이 어쩐지 거품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게 그 사람은 마치 콜럼버스 같은 존재였다. 모퉁이를 깨트려 세운 달걀처럼, 뭐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싶은 그림을 가지고 그 정도까지 인정받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발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교수님께 들은 그 화가분의 성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쾌활한 듯 느껴졌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적이고 차분한 느낌 때문에 난 그 화가분이 굉장히 조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 앉아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비슷한 그림들에도 결코 질려하지 않는, 마치 수행자 같은 그런 성격 말이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김 작가가 말이야, 사실은 말이야, 엄청 못된 사람이야.” 이렇게 운을 떼면서, 교수님은 정말 비난하려는 의도는 1g도 찾아볼 수 없는 장난기 어린 얼굴이 되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다들 갑자기 생겨난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골몰하느라 교수님의 이야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있는 가운데, 나는 혼자서 교수님이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개구진 교수님의 표정은, 소년의 그것처럼 해맑았다. 그렇지만, 역시 해맑게 뒤이어진 교수님의 발언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해맑게 듣고 넘길 수 없을 만큼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김 작가는 만날 그림 스케치만 대충해놓고 나랑 놀고 막 그러고 말이야, 사실 그림은 김 작가 밑에 있는 애들이 다 그린다니까. 걔들이 무슨 죄냔 말이야. 고생은 자기들이 다하는데 그림은 김작가 그림이라 그러지. 불쌍해 정말.”
흐흐흐, 웃으시는 교수님. 나는 교수님의 그 발언에 뒤통수를 한 대 꽝 맞은 것 같았다. 보통 어시스트들이 궂은일을 다 맡아 한대도 겉으로 이름을 드러내거나 하진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새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교수님은 잡담을 마무리 하시고 태연하게 본론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황망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듣는 둥 마는 둥 남은 수업시간동안 그저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다행하게도, 남은 수업시간이 그렇게 길진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앞당겨진 하교시간으로 그 후 잡혀진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해봤다. 나는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누구나 예술의 세계에 대한 환상은 갖고 있다. 나 역시 열외일 수는 없다. 음악은 내가 듣는 귀가 못 되니 열외로 하더라도, 그림만큼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다. 화가들. 미술계. 그 역사와 암투들, 그리고 그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멋지잖은가!
한국 미술계에서 ‘거장’ 꼬리표를 달고 계신 작가님이다. 나 같이 뭣도 모르는 나부랭이는 아무리 그분 그림을 긁어댄다고 해도 ‘뭣도 모름’을 광고만 할뿐, 그분 명성에 좁쌀만 한 흠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명성을 자랑하시는 분. 그분의 다작이, 어시스트들 손을 빌려 창조되고 있었다는 점은, 어쩌면 평상시 그분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내게, 일종의 배신감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대단하다고 생각해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평소에 흠모하던 작가분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을 하다가, 얕게 잠이 들었다 다시 깨서 생각을 하고, 그러는 동안 약속시간이 점차 다가왔다. 그리고 부족하게나마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어시스트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나 보다, 하고. 작가님이 어시스트들을 제자로 생각하고 자신의 노하우들을 전수하고 있든 혹은 정말로 악덕하게 어시스트를 단순히 도구로 부려먹고 있든 간에, 나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냥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로 어시스트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단순하게 스케치만하고 작가는 자릴 뜨고, 남은 어시스트들이 세밀한 붓을 들고 지시한대로 색을 메우는 화실.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이 장면 속 어시스트들은, 과연 프린트기와 다를 게 무엇일까.
하지만, 나는 이것이 과장된 이미지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거장의 어시스트들은 대개 열악하지 않은 환경에서 작업한다. 어시스트들은 거장의 밑에서 이것저것을 거들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거장의 어시스트로 일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큰 커리어가 되기도 한다. 내가 감히 ‘불쌍하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거기서 생각의 흐름이 멈춰줬다면, 나는 오늘의 수업을 성실하게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마치 불씨처럼, 내 생각의 꼬리를 타고 이 곳 저곳으로 번져갔다. 불쌍한 감정은 순간적으로 내 좋을 대로 과장한 상상을 부싯돌삼아 발화되어 불특정다수의 어시스트들, 거장이지 못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상 수많은 (甲-乙관계에서의) ‘乙’들과, 그나마 그 ‘乙’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로 점점 옮겨갔다. 죄다 불쌍하게 느껴졌다.
미술은, 그나마 산업에서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이니까. 하지만 작품도 상품이고, 명성도 상품이고, 결국엔 예술도 상품이다. 그러다보니 그리는 사람도 상품이 되고 만다. 그나마 ‘멀다’는 미술조차 이러할진대, 대놓고 ‘산업’인 경우야 말할 것도 없지 않나.
이러니 20세기의 찰리 채플린은 이미 죽었고, 흑백 무성 영화 대신 3D 4D 영화들이 오감을 자극하는 21세기의 ‘Modern times’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찰리 채플린일 수밖에 없다.



나사를 조이는 단순한 작업에 비한다면야, 그림을 그린다거나, 상한가의 주식을 예측하고, 새로운 기획안을 내놓는 현대의 많은 일들이 꽤나 ‘인간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크게 놓고 본다면,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그저 부품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20세기나, 21세기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모던 타임즈’는, 코미디 영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마냥 “영화 되게 웃기네요ㅎㅎ”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이게 단순히 ‘웃긴 영화’는 아닌 게 확실하다.
어제나 오늘의 미디어, 그리고 내일의 미디어에서 전하는 사실들도 충분히 코미디다.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사람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것이 ‘각성’이 필요할 정도의 대단한 일인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인간성의 상실, 인간의 도구화,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모던한 것은 오로지 그뿐이다. 오랜만에 ‘모던 타임즈’를 보고 있자니, 영 불편하다. 흑백의 화면도 불편하고, 무성영화인 것도 불편하고, 내용도 불편하다. 하지만 덕분에 반성한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날이, 언젠가는 그저 뭉툭한 과거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모던하였을 것이 분명한, 온전히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로.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