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역사 현장 탐방 31 - 낙성대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낙성대를 둘러봤습니다.


#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인 ‘낙성대’ 전경



“선배, 그 왜 낙성대 있잖아요. 거기 들어가기 어려운가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하긴 지방에서 올라온 데다 서울대학교 옆에 있고 지하철 역명까지 낙성대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성대는 말 그대로 별이 떨어진 곳이다.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때 하늘이 전조를 보여준다는 설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기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낙성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엔 강감찬 설화가 수록돼 있다. 어느 날 밤 중국 사신이 길을 가다 큰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갔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바로 강감찬 장군이었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은 커서도 수백년 된 호랑이를 꾸짖어 백성을 구했다는 등의 일화가 여럿 남아 있다.


# 관악산을 뒤로 하고 위엄을 자랑하는 강감찬 장군 동상

‘전설적 인물’로 칭송

낙성대역 옆 차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멀리 ‘낙성대공원’이란 커다란 문구가 보인다.
휴식을 나온 노인들이 그늘 아래 담소를 나누고, 어린이들과 산책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관악산을 배경으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위엄을 자랑한다.
낙성대의 옛 이름은 금천으로 지금은 관악구 봉천동에 속한다. 948년 이 곳에서 태어난 강감찬 장국은 우리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중 한 명이다.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부시랑이 됐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많은 신하들이 항복하자고 했지만 63세의 강감찬 장군은 이에 반대했다. 그는 하공진으로 적을 설득해 물러가게 한 뒤 한림학사 이부상서 서경유수 등을 역임했다.






# 홍살문과 안국문, 안국사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다시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뒤 쫓겨가는 적을 크게 격파했는데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73세가 되던 1020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저술에 전념하다 1030년 왕에게 청해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됐다. 이듬해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문인 출신답게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시호는 인헌이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 시대 이후 민중에 전설 같은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후세까지 전해졌다.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 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여우부인과 관계를 맺게 돼 낳은 아기가 강감찬 장군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같은 신기한 출생담은 다른 위인이나 시조의 출생설화와 비슷한 측면이 많다. 비슷한 사례로 민중 속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 장군을 생각할 수 있다.


# 안국사에 모셔진 강감찬 장군 영정

문신 출신답게 아랫사람을 관리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군이 소년 원님으로 부임했을 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관속들이 얕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장군은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한결같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겨우 일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고 호통을 쳐 기를 꺾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어느 고을에선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럽자 부적을 써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 곳의 개구리들이 다시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남산(혹은 삼각산)에 사는 수백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이에 강감찬 장군이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고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적지 않다.




# 장군을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는 삼층석탑.
‘강감찬 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강감찬 장군 사적비

이처럼 많은 일화들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강감찬 장군에 대한 민중들의 숭배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절정이 낙성대라고 할 수 있다.

말년엔 ‘저술 전념’

거란군을 격퇴한 뒤에도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이런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 집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은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 안국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보이는 게 삼층석탑이다. 탑에는 ‘강감찬 낙성대’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사리탑식의 삼층석탑은 상부가 훼손되는 등 계속 방치돼 오다 1964년 보수를 거쳐 1972년 지방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다.


# 낙성대 공원 입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 산책하는 사람들

이후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출생 유적지를 정화하고 사당과 부속건물을 신축했다. 원래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석탑도 여기로 이전했다. 석탑 맞은편엔 거북이 모양을 한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자연석에 ‘낙성대’라 쓴 기념 휘호석도 있다. 안국사 안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관악산 자락을 낀 낙성대는 인근 산책로와도 연계돼 있어 등산 코스로도 제격이다. 호국의 달인 6월, 나라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장군의 숨결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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