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벌, 벌, 벌과의 한철-여섯번째 이야기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완전히 그짝이었다. “형님은 마누라도 없지 않으냐”고, 자기는 마누라가 있으니 서울로 출퇴근을 하겠다고, 기왕지사 출퇴근을 하는 마당이니 일이 없을 때는 안 오고 일이 있을 때만 오겠다고, 후배녀석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설마, 설마, 설마했었다. 그런데 녀석은 정말로 가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밤이 깊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간에 완전히 홀로 떨어져 나온 기분인 채로 하루내내 허둥거렸다. 잠이 쏟아진다는 기분이면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책을 읽자 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뭔가 낙서라도 좀 해보자 해도 머릿속이 회반죽처럼 무지근해서 아무 짓도 안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집을 떠나온 지 열흘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만성피로 증후군 같은 것에 잡혀버린 것 같았다.
이놈의 벌치기 것이 그랬다. 일 같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노동에 못지않은 에너지소비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피로가 쌓이는 참으로 기기묘묘한 일이었다. 근육을 써야 하는 노동이 지속적이지를 않고 채밀을 할 때나 이동을 할 때 서너 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일 터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무도 불규칙한 짓을 해대니까 육체가 방향을 못 잡고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후배녀석은 다음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전화를 걸어 왔다. 전화를 걸어서 거두절미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일꾼 타령이었다.
“우리 일꾼들 어떻게, 일 좀 하요 어쩌요.”
“일꾼? 뭔 넋빠진 소리라냐?”
“아따 형님도 참, 아 우리 일꾼들 말이요. 근로자들.”
그 말을 듣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이해가 되었다. 일벌 한 마리를 근로자 한 명으로 계산하는 녀석의 셈법이 제법 발칙하면서도 그럴 법하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수십만 아니 어쩌면 백만에 육박하는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초대형 재벌의 회장인 셈이었다. 그러면 나는 바지사장인가? 아니면 공장장?
생각해보니 이게 참 맹랑한 일이었다. 녀석이 벌통을 차에 싣고 다니며 천지사방 구경도 하고 여행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유목이다.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거나 나중에 봉쇄되었거나 하여튼 빠져나갈 길이 막혀버린 이 시대에 유목의 자유라도 누리지 못한다면 숨이 막혀서 어찌 견뎌낸단 말이냐 하는 따위 개똥철학을 정신없이 만지작거리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나는 졸지에 급전직하, 벌통 관리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 분명해져 있었다. 녀석과 함께 있을 때는 뭔가 동업자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일종의 착각이었다. 착각도 굉장한 착각이었다. 녀석이 마누라 곁으로 가버리는 순간 그 착각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녀석이 전화를 해서 근로자들 일 잘하고 있느냐는 둥 너스레를 떨어대는 순간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너희 둘의 관계는 동업자가 아니라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마, 하는 그런 것.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는 관리자로서의 임무에 성심성의를 다해야 한다, 알았나?
그래, 알겠다. 그렇다면 나의 임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관리자라면 관리자에 준하는 보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그 유명한 ‘인정 문화’가 발동하고 있었다. 에이 보수는 무슨, 하다가 다시 아니지, 임금 없는 노동이 어디 있는가, 하다가 다시 아니지, 내가 하는 이게 노동인가?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어리버리한 계산법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석 달 동안을 거의 무료봉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그야말로 ‘꿈엔들 알았으리요’, 였다. 꿀을 따기는 했지만 3개월 동안 얻은 꿀이 고작 다른 사람들이 열흘 동안에 얻은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나중에 벌들의 식량인 설탕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대부분 지출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중이야 어떻든 그날은 그랬다. 수십만의 근로자를 부리는 재벌 회장님인 녀석의 ‘지시’에 따라 벌통을 열어보고 벌들의 행동을 또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벌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뭔가 상서롭다는 느낌이 팍팍 오고 있었다. 대구에서와는 영 다르게 벌들의 움직임이 총알처럼 빨라져 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정말로 무슨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보였다, 하면 벌써 안 보일 정도로 벌들이 휙휙 날고 있었다. 얼굴에 보호망을 쓰지 않고 벌통을 열어봐도 덤벼드는 벌 한 마리 없었다.
사방천지에 꿀이 가득해서 정신없이 바빠진 벌들이 도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도둑이라는 인식을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도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부자의 관용인지, 넘치는 재화 속에서 일시적으로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것인지, 그런 것들은 보다 깊이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자본에 관한 벌들의 인식이 인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인간은 재물을 ‘정신없이’ 끌어 모으면서도 그것을 탐내거나 손을 내미는 자가 있으면 즉각 법의 이름으로 쳐내 버리는 ‘정신머리’가 있지만, 벌들에게는 그것이 없거나 있어도 활용할 필요를 못 느끼는 ‘여유만만’의 삶이 있어 보였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을 확연하게 알았다.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니라는 것. 밖에서 보기에는 다 같은 꽃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알았다. 대구에서 ‘산적’이 “올해의 대구 아카시아에 꿀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참으로 황당했었다. 무슨 그런 법칙이 다 있는가, 싶으면서도 세세하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여태 그것도 몰랐다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알았다. 그 앎에서 오는 기쁨이 어찌나 크던지, 꽃과 벌 사이를 오가면서 불러낸 유행가 콧노래가 얼마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어, 아저씨”하면서 다가온 삼십대 중반쯤의 그 남자가 내게 물었다. “아저씨가 이 벌통들 주인 맞나요?” 글쎄, 이런 경우 뭐라고 말해야 좋은지 몰라 한참을 멍 때리고 서 있었다. 내가 주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에게 그런저런 내력을 설명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쨌든 뭐 주인이 맞다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이 남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벌통 하나 빌리는 데 얼마면 되나요?”
엥? 뭔 소리냐 이게? 나는 내심 그 남자가 꿀을 사러 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벌통 임대를 거론하고 나섰다. 너무도 황당한 질문이라서 또 한 번 멍 때리고 서 있는데 한 가지 얼핏 생각나는 게 있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벌통을 임대해서 쓴다는 이야기, 아아 그렇구나, 하고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하는데, 그런데 그 남자는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저는 뭐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벌통 하나로 최대 스무 개까지 늘리는 게 가능하다던데 그게 맞나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오리무중도 무슨 이런 오리무중이 있는가 싶었다. 그래서 행색을 좀 더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농사꾼 스타일은 아니었다. 벌통을 싣고 다니면서 유목하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인가 싶어 다시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쪽으로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럼 뭐냐 이거? 혹시 정신병원을 탈출한 사람? 그런 오만 잡동사니 생각을 되작거리면서 멍청하게 서 있기를 얼마나 했던가. 남자가 문득 한 마디 했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던 것 같군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남자는 돌아섰다. 그리고 금방 사라져 버렸다. 대낮에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 기이한 손님(?)의 의중이 무엇이었던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여나 지나서였다. 시흥을 떠나서 다른 곳에 봉장을 설치할 목적으로 소위 답사를 과정에서였다. 장소는 서울과 안양의 중간에 위치한 어느 산 속.
아카시아 꽃이 제법 보여서 들어갔는데 산속에 시커먼 차양막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부근에 무슨 군사기지가 있어서 탱크나 대포 같은 것을 감춘 위장막인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시커먼 차양막 아래 벌통이 수백 아니 수천 개나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놀고 있는 벌도 제법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벌통의 개수에 비해 벌은 너무도 적었다. 벌통 하나에 벌이 고작 수백 마리에 불과한 것 같았다.





“아저씨들 누구십니까?”
돌연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 한 귀에 들었어도 저기 멀리 ‘옌벤처자’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명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가며 접근할 때도 보이지 않던 개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다. ‘옌벤처자’들은 의심이 가득한 표정에 적대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는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일단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 뒤에 이것들이 다 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뜸 날아온 목소리.
“보면 모르십니까. 벌 아닙니까.”
그래, 그랬다. 우리는 보고도 몰랐다. 벌을 보면서도 벌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벌통 하나에 수백 마리 정도의 벌로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러나 ‘연벤처자’들은 더 이상 우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의혹만 가득찬 채로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기이한 의혹이 확연하게 풀린 것은 그로부터 열흘도 더 지나서였다. 포천, 문산을 거치는 동안 꿀은 한 말도 못 따고 대부도로 이동한 뒤의 어느 하루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낯선 남자는 오리농장을 하면서 오리주물럭 전문식당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조류독감이 유행해서 3개월 동안 단 한 마리의 오리도 팔지 못했단다. 그래서 남자는 몹시 우울해 있었다. 우울한 중에 우리의 벌통을 보고 구원처럼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는 거였다. 미리 말하자면 그는 인천의 무슨 조폭에 소속되어 있다가 보스의 허락을 받고 조직을 빠져나와서 이른바 ‘새 삶’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아내도 물론 있었고, 아이도 둘이었다.
“벌통 보상 단가가 썩 좋다는 정보를 내가 입수했단 말이거든.”
그는 솔직했다. 수인사를 끝내자마자 자신의 의도를 먼저 까발리고 나왔다. 잔머리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부기관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먹고 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 무렵의 대부도 일부 지역은 인천시의 개발예정 구역으로 고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농장과 식당이 전부 그 구역 안에 있었다. 오리농장의 오리래봐야 보상을 받는다 해도 몇푼 안 되고, 식당 또한 고시가격 이상의 보상은 바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벌통을 두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물색 중이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입수했다는 정보에 따르면 벌통 보상 단가가 썩 높았다. 소나 돼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투자 대비 수익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나 돼지는 거짓이 허용되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실사를 나오면 이내 그 마릿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벌은 그게 불가능했다. 실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공무원들의 벌에 대한 무지 때문에 실사를 꺼리기도 하고, 실사를 나온다 해도 벌통을 열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주인이 백만 마리고 하면 백만 마리로 적고, 천만 마리라고 하면 또한 천만 마리로 알고 그렇게 그냥 속아 넘어간다는 얘기였다.
설령 실사담당 공무원이 벌통을 일일이 열어보는 충성심을 발휘한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꿀을 따오는 게 직업인 벌들이 대낮에 벌통 안에 왜 있겠느냐. 밖에 나가서 일하는 벌들이 보이지 않느냐. 이 한마디면 공무원은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하는 사기꾼들의 전문성은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우리가 그때 본, 서울과 안양 사이의 숲속에서 본 그 수천 개의 벌통이 그런 용도로 ‘거기’에 놓여 있었다는 말이었다. ‘옌벤처자’들이야 당근 높은 월급을 보장받고 고용되어 외부인의 접근이나 감시하고 있었을 것이고, 주인은 담당공무원이 실사를 나올 때나 얼굴을 내비치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이었다. 그로부터 5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그 숲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신속하게 개발정보를 빼내서 활용하는 것일까? 그들이 챙기는 보상비라는 게 결국 내가 낸 세금인데, 허탈해서 어떻게 무슨 맛으로 일하며 살라고. 쩝.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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