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길목에서




갈참나무를 바라보며

‘700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갈참나무….’ 안내판에 그렇게 적혀 있다. 갈참나무란 쉽게 말하면 도토리나무다. 참나무가 상수리이다. 우리나라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의 하나가 도토리나무다. 도토리를 따다가 묵을 만들어먹을 정도로 도토리는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감탄하는 것은 나무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나무가 큰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나무가 살아온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700년이라면 엄청난 시간이 아닌가?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심어졌다는 이야기다. 그 오랜 세월을 한 곳에서 지키며 살아온 나무가 경이적이지 않은가? 나무는 많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을 것이다. 아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반복하여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을 뿐이다.
나무는 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바람에 부러진 흔적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가지 또한 굽어있다. 살아온 풍상을 온 몸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700년 세월을 살아온 나무의 경이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올려다볼수록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린다. 나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인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전라남도 장성에 위치하고 있는 백양사이다. 700년 된 나무라는 표지판이 있는 나무 외에도 많은 갈참나무들이 각각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서 있는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온 나무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주고 싶은 것인지 귀 기울여 들어본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들어본다.



‘애틋한 마음으로 순수한 사랑을 꽃피우라!’ 나무는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애틋한 마음을 깨우라 한다. 애틋한 마음은 원형의 마음이다.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원래의 마음이다. 깨끗한 마음이 아래로 가라앉게 된 것은 욕심에 밀리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마음에 밀렸기 때문이다. 성내는 마음에 밀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밀리면서 설 곳을 잃어버린 마음은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결국은 존재조차 모르게 되어버린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순수한 사랑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사랑이란 물들지 않은 사랑을 말한다. 티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아름다운 사랑이다. 욕심이 넘치는 마음으로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없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원래의 마음 애틋함으로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700년 된 갈참나무를 바라보면서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분명 아니리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로부터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찾아본다. 최소한 왜 왔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내 안을 본다. 나에게도 순수한 마음이 있는지, 순수한 사랑을 했는지 반추해본다. 나무가,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참 아름답다.



바닷가에서 만난 대추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대추를 만나니 놀랍다. 대추는 산기슭이나 물 빠짐이 좋은 들판에서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바닷가다. 그것도 새만금 간척지로서 대추나무가 자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곳이다. 조금은 낯선 곳에서 만난 대추는 생소하기만 하다. 물론 나의 지식이 일천하여 대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만난 대추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막바지 더위를 피해보고자 찾은 곳이 새만금 간척지이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방파제 부근은 많이 가보았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았다. 어은동이 바로 그곳이다. 군산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는데, 제방으로 막아버려 배는커녕 물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런 바닷가에서 대추를 만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바다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대추는 아주 유용한 열매다. 우리 조상들은 젊음을 유지해주는 명약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대추차를 즐겨 마시는 나로서는 대추가 그렇게 정감이 갈 수가 없다.바닷가에서 만난 대추의 끈질긴 생명력이 새롭게 다가온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옛말에 "대추를 보고도 먹지 않으면 늙는다" 라는 말이 있듯이 내장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장장제로서 온 몸을 튼튼히 하는데 최고의 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대추 세 개로 하루 요기를 채운다 할 정도로 영양도 풍부합니다. 제사상에 으뜸으로 올리는 것이 대추인데 그 이유는 씨가 세 개라 왕(삼왕)을 칭하니, 자식들이 왕이 되길 소원하는 것이며, 가장 늦게 꽃이 피지만 가장 빨리 열매를 먹을 수 있으니 이 말은 장가는 늦게 가도 빨리 자식을 낳으라는 뜻이며 많이 낳길 기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과히 정력제라 할 수 있지요]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추가 약이 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설명을 보니 대추가 참으로 좋은 식품이란 것은 분명해졌다. 우리 몸에 좋지 않은 식품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바닷가에서 만난 대추가 더욱 정감이 간다. 앞으로 더욱 애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우리 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은 지금 우리 것에 대한 경시 사상이 팽배해 있지 않은가? k-팝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작금에 우리가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다.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난 대추를 바라보면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애용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실천할 때 아름다워질 수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사랑하고 애용할 때 진정한 k-팝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닷가에서 자라고 있는 대추를 통해 우리 것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갈겨니의 역동성

몰려드는 갈겨니들의 힘이 대단하다. 던져준 뻥튀기를 순식간에 낚아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다. 서로 먹으려고 경쟁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귀다툼이란 바로 저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 모습이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동성에서 삶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갈겨니는 우리 고유의 토종 물고기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잉엇과의 민물고기. 몸의 길이는 10cm 정도이고 피라미와 비슷하나 비늘이 작고 눈이 크며, 몸 중앙에 분명하지 않은 어두운 세로띠가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등지의 하천에 분포한다]라고 풀이 되어 있다.



그들이 먹이를 낚아채기 위하여 경쟁하는 모습을 통해 걸어온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처럼 역동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는지 되묻게 된다.
이순의 나이를 앞두니, 무엇이든지 심드렁해진다. 한 마디로 늙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 줄 잘 안다.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 힘을 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 하나 재미있는 일이 없다. 내 삶에서 역동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난감하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옛 성현들은 맑고 깨끗한 거울은 잘 보지 않았다고 한다. 잘 생긴 얼굴이라면 맑은 거울에는 그 멋진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겠지만, 못생긴 얼굴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비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못생긴 사람은 실망하고 살 의욕을 상실하게 되기에, 맑은 거울을 멀리하였다고 한다. 거울이란 얼굴은 비추어줄 수 있지만 마음까지 비추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본질은 얼굴의 형상이 아니라 마음이란 점을 강조한 이야기다.



갈겨니의 역동성을 바라보면서 거울을 생각한다. 거울의 맑음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직시하게 된다. 나의 본질인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역동성을 상실한 것은 마음의 활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다. 얼굴에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된다. 성형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고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겨니의 역동성이 부럽다. 갈겨니처럼 살아가고 싶다. 역동성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활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마음을 쫓아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아야 한다. 청춘의 열정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생각이 아닌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삶을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잃어버린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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