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가을의 문턱에서




매미의 노래

“매∼맴, 맴 맴!” 반갑게 맞이해주는 노랫소리가 정겹다. 자동차에서 내려 절에 가는 길이다. 다리를 넘어가야 한다. 곡선의 다리를 건너다보니 피안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화엄의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건너야 하는 다리가 아닌가? 문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매미의 노래는 사랑의 노래다. 탈피를 하고 난 매미는 죽을 때까지 이슬만 먹고 산다. 아니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의 목적 자체가 사랑인 셈이다. 사랑을 위하여 노래하고 사랑을 위하여 전념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니, 숭고하지 않은가? 매미의 노래 소리에 듬뿍 취해본다.
실상사는 신라 말에 만들어진 고찰이다. 9산 선문의 본사로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절이다. 지금은 유기농을 실천하며 귀농을 돕고 있기도 하다. 크지 않은 절이지만 다수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탑이며 보광전 등 다수의 문화재들이 찾는 이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매미 소리만 절 마당에 가득할 뿐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매미의 노래 소리를 따라 멀어지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여유를 느껴본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여름이지만 견딜만하다. 등 뒤론 땀방울이 느껴지지만 다가오는 가을 앞에서는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는 여름에 손짓을 하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기 위하여 준비한다.
온 몸으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하늘은 마음껏 높아져 있고 매미의 노래 소리가 가을을 환영한다. 가을이 오면 사랑을 하고 싶다. 후회하지 않을 멋진 사랑을 하고 싶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



저 매미처럼 사랑의 끝이 비극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을 사랑을 하고 싶다.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사라진다 하여도 개의치 않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 그 끝이 죽음이라 하여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산사에서 매미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풀꽃을 바라보며

손짓하며 방긋 웃는 모습이 참 곱다. 이름 모를 풀꽃이 나를 부른다. 연분홍 색깔로 곱게 단장을 하고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어찌 저리도 고울까? 어쩌면 저리도 사랑스러울까? 초록의 풀밭 사이에서 우뚝 피워낸 야생화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저리도 돋보이는 꽃은 드물다. 새삼 감동에 젖게 한다.
풀꽃은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에 큰 기쁨을 준다. 움직일 수 없는 풀꽃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꽃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하여 뭔가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저 풀꽃을 나만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길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풀꽃은 자신을 보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풀꽃을 본 사람들은 나처럼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기쁨을 주고 있는 풀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나는 참 많은 것을 가졌다. 풀꽃처럼 평생을 한자리에만 고정되어 있지도 않는다. 풀꽃에 비하여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단지 그 마음먹는 것이 문제다. 풀꽃은 자신을 위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욕심으로 얼룩져 있다. 생각하는 것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고 있다.
유한한 인생에서 나를 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보낸 시간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되돌아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일은 부지기수이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노력한 일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란 말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노력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니, 난감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살아온 인생이 허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풀꽃을 본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저 풀꽃처럼 살아가야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겠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중에서 가능하다면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에 헌신하고 싶다. 곱게 피어 있는 풀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운 향을 피워내고 싶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호박꽃

매가 익어가는 중에도 호박꽃은 피어 있다. 노랗게 피어 있는 꽃들이 유혹한다. 결코 예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의 그 어느 꽃이 예쁘지 않을까. 그럼에도 호박꽃도 꽃이라고 우쭐댈 이유는 없다고들 말한다. 가을의 길목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며 호박꽃도 고운 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세상의 그 어떤 꽃과 비교하여도 아름답다.
호박꽃을 보며 사람의 용모를 생각해본다.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세상이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 치의 양보가 없다. 겉으로 드러난 용모에 집착하여 갖가지 부작용이 일어난다. 특히 마른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지 못할 일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얼굴이란 공허한 것이다. 젊음이 넘쳐나는 시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충실을 기하려 하지 않고 얼굴을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근본 마음이 중요함에도 내면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에만 집중을 한다. 내면은 텅 비어 있음에도 겉모습만 화려한들 어디에 쓸 수가 있단 말인가? 얼굴보다는 내면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호박 열매는 비타민A와 칼륨이 풍부하며, 여러 방법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호박죽을 끓이거나 떡 등에 첨가하여 먹고, 서양에서는 파이를 만들어 먹는다. 호박씨는 널리 애용되는 간식이고 단백질과 철분의 공급원이기도 하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못생긴 호박이지만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호박의 과육은 물론이고 씨앗까지도 간식으로 즐겨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용하다.
호박꽃도 꽃이다. 아니 우리 생활에 아주 유용한 작물이다. 그럼에도 생긴 모습이 우습다고 하여 경시한다. 호박이 있는 곳에 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호박은 우리의 삶에 아주 유용한 존재이다. 푸대접하는 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얼굴은 우리의 삶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굴을 가꾸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뭔가 잘못되어지고 있다. 말초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본디의 모습이다.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는 철학이 필요하다. 특히 열정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얼굴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호박꽃처럼 실질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호박처럼 유용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얼굴보다는 내면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마운 아내

잘 차려진 밥상이다. 아내를 위하여 일부러 순창까지 왔다. 순창은 장수의 고장이요, 고추장의 고장 아닌가? 고추장은 고추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음식인 된장이며 장아찌 등 발효식품을 모두 다 포괄한다. 순창 역시 고추장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간장, 된장도 유명하다. 밑반찬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한식도 이름이 나 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아내의 눈동자가 빛난다.
아내에게 어서 먹어보라고 재촉한다. 젓가락이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만큼 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놓여있다. 조기를 비롯 돼지고기, 소고기 등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즐비하니,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집사람은 젓가락을 여러 음식으로 옮기면서 조금씩 맛을 본다. 음식의 맛이 입에 맞는지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내에게 대접만 받아온 세월이다. 결혼한 이래로 지금까지 아내가 해준 음식으로만 살아왔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만든 음식을 먹어왔지만 지금까지 고맙다는 말을 해보지 못하였다. 고맙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뻔뻔스러운 마음이 첫 번째 이유다. 그런 무뚝뚝한 나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아내였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그 것은 아내가 만든 음식이 내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런 줄도 모르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아내의 손맛이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하여 불만만 토로한 것이다. 아내의 손맛에 내가 맞추려는 노력을 했어야 함에도 아내에게 불만만 늘어놓은 것이다.
미안하였다. 아내는 지극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준비한다. 그것도 걱정을 아주 많이 하면서 음식을 하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불안해하면서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가장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아내를 구박해온 것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정성만으로도 맛있게 먹어야 옳았다. 그렇지 않은 나 자신이 미워졌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순창을 찾은 것이다. 이름이 나 있는 순창의 음식을 앞에 두고 집사람에게 그동안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다. 그런 말을 들은 아내의 입에서는 미소가 번졌다. 괜찮다고 하면서도 흡족한 표정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도 보기에 좋고 행복한 웃음을 띠는 모습도 보기에 좋다. 환하게 웃는 집사람을 보면서 한식이 우리 체질에 정말 잘 맞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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