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 이거 다 내가 잡았어요

산에서 고사리를 꺾을 때의 손맛을 아는 사람은 갯벌 속의 조개를 캐내는 순간에 얻어지는 손맛을 또한 안다. 그 앎의 어디에도 그것을 어떻게 요리하면 맛이 좋은가 하는 생각은 아직 없다. 먹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손 안에 들어오는 존재감을 뿌듯하게 느끼며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러댈 따름이다.
“아따 여기도 있네.”
“어마 저기도 있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했다. 갯벌 속에 든 조개를 캐내는 것은 내 마음을 캐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길을 나섰다. 동생들이며, 제수씨들이며, 벌써 어른이 되어버린 조카에 갓난쟁이 조카들까지, 거기에다 또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옥천의 누이까지 해서 열여섯 명이나 한꺼번에 우르르 손에손에 호미를 들고 집을 나섰다. 조개잡이로 서너 시간쯤 정신없이 어울려서 다함께 땀을 좀 흘려보자. 말하자면 다함께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울력을 통해서 형제들간 혹은 가족간 유대감을 좀 더 강화해보자 하는 것이 조개잡이의 주된 목적인 셈이었다..
그런데 일이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조개가 너무 많아서 재미없다고 야단들이다. 어쩌다 한 마리씩만 잡혀야하는데 호미질 한 번에 서너 마리씩의 조개가 나와 버리니 이게 뭐냐고, 너무너무 재미가 없다고, 한 마디 두 마디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하나씩 둘씩 여기저기 제멋대로들 흩어져 버린다.
그것 참, 별 희한한 불만도 다 있다, 싶으면서도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린다. 아니 그럴 듯이 정도가 아니라 이건 진리다, 하는 뒤늦은 깨달음(?)도 있다. 많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이러한 발견은 너무나 소중해서 주머니에 곱게 넣어두고 싶기도 하다. 역시 그런가 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물자가 풍부해지면 사람은 그렇게 자동적으로 멀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어 있나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많아서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재미가 없다고 딴짓(?)을 찾아 멀리로 가버렸지만, 경험이 적거나 아예 없는 사람은 재미도 이런 오진 재미가 없다고 쭈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줄은 모른다.




# 사촌오빠의 선물


“야야, 넌 뭘 그렇게도 죽을둥 살둥 호미질만 하는 거냐. 쟤들처럼 하는 일 없이 그냥 돌아다니면서 갈매기도 보고 해라, 응?”
“아이 오빠도 참, 먼 소리여. 이것도 재밌어 죽겠고만 그냥.”
“조개 처음 잡아보냐?”
“처음이제. 언제 뭐, 이런 데 와 보기나 했간디.”
아, 그랬었구나. 너는 아직 이런 시간도 한 번 못 가져보았었구나. 왜? 무엇이 그렇게도 바쁜 일이 많아서? 아니면 이런 일은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그렇게 신나는 일이 많았었던 것이냐? 묻고 싶지만 한 마디도 물을 수가 없다. 그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이 슬쩍 돌아서서 뭔가 다른 말할 거리를 찾아보는 것, 그 순간에 못난 오래비란 작자가 취할 만한 행동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말할 소재를 찾아냈다.
“너무 깊이 빠져버리면 집으로 못 가는 수도 있다, 너? 조심해야 해.”
“치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말이야. 물 들어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람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어.”
“정마∼알?”



# 아주버니 저게 뭐예요



# 야 너 어디 가



그렇다. 이것은 협박이나 농담이 아니다. 조개잡이에 너무 깊이 빠지면 정말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잡은 양이 너무 많아서 들고 나오지 못해 쩔쩔매다가 결국은 망에 든 채로 버려서 폐사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사람이 통째로 물에 잠겨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발생한다.
칠 년 전이던가 팔 년 전이던가, 그 해의 여름 초등학교 상급반 여학생 일곱 명이
심원면의 만돌벌에서 그 재미에 빠졌다가 두 명만 남고 다섯 명은 물과 함께 사라진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다함께 어울려 조개를 캤지만, 차츰 두 명씩 세 명씩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그룹간의 이야기꽃에 취해 서로 흩어지는 줄도 몰랐다. 밀물이 어느새 정강이까지 차올랐을 즈음에서야 어마, 얘들이 어디 갔지?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물 밖으로 나온 뒤에서야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썰물도 아니고 밀물인데, 들어오는 물인데 어떻게 사람이 물에 실려 난바다로 나가버릴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로 한동안 설왕설래가 있었기도 했다. 바다를 직장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 간에 있었던 설왕설래였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은 그런 일로 고민하지 않는다. 바다를 안다는 것은 물의 길을 안다는 것이다. 나가는 물에도 길이 있지만 들어오는 물에도 당연 길이 있다. 그 길은 인간 사회의 고속도로처럼 직선이 아니고 앞과 뒤의 구별이 따로 있지도 않다. 허공중에 흩어지는 연기와 같은 것. 연기가 바람의 정도와 세기 그리고 기압에 따라 흩어지는 방향이 늘 달라지듯이 바다의 물도 그렇게 매번 다른 길을 만들어낸다.


# 어린 건 잡지 마


# 와아 누나 잘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밀물이 앞에서 밀려오는 게 아니라 뒤에서 갑자기 덤벼드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길을 만들면서 그 길을 이용하는, 때로는 수동적으로 길을 따라 움직이는가 하면 또 때로는 능동적으로 길 자체가 되기도 하는 바다, 그 길,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난바다로 나갔던 밀물은 다음 밀물 때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도 다시 데려오기는 했다. 실종된 다섯 명을 모두 데려오지는 않았다. 두 명만 데려다가 해변에 부려놓고 다시 나가 버렸다. 나머지 세 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디까지 갔는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막연하게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바다가 그 아이들을 어디로 몰래 데려다가 숨겨놓고 함께 살고 있을 거라는 그런 동화 같은 상상을.
“큰아빠, 큰아빠∼아. 여기 좀 봐 주세요.”
여섯 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무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 녀석이 그새 사람이 됐다고 사람의 소리로 큰아빠를 불러대고 야단이다. 뭐냐 왜 그러냐?
“이거∼어 유정이가 다 잡았어요.”
키키, 요녀석 좀 봐라. 제 고모가 잡아놓은 것을 하나씩 둘씩 몰래 가져다가 쌓아놓고는 제가 잡았다고 우긴다. 일단 그렇게 우겨놓고는 저도 아니다 싶은지 고개를 수그린다. 그래라. 그렇게 너 자신을 증명해 보여라.


# 우리는 산책이나 하자


# 이것도 재밌어 죽겠고만


“큰아빠, 큰아빠아, 조개는 왜 흙 속에 있어요?”
“흙 속이 집이니까 흙 속에 있는 거지.”
“맨날 흙 속에만 있는 거예요?”
“아니, 바닷물이 들어오면 조개도 밖으로 나와. 나와서 놀기도 하고, 일도 하고. 조개도 먹고 살아야 하거든.”
“바닷물은 어디서 와요?”
“갔던 데서 오지.”
“갔던 데가 어디에요? 바닷물은 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집이 없어서요? 큰아빠, 큰아빠∼아, 바닷물은 집이 없는 거냐고요∼오.”
아이들은 궁금한 게 많다. 궁금증도 무슨 자잘한 일상적인 것들이 아니다. 파격도 그런 파격이 있을까 싶은 정도의 완전 파격의 거대한 질문을 아이들은 거침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부럽다. 나는 어른 행세를 하느라고 궁금한 것이 너무 적어졌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알고자 하는 마음이 크지도 않다. 그렇게 아는 것도 없고 궁금한 것도 별로 없다 보니 아이들의 질문에 쩔쩔매기 일쑤다. 그래서 속으로 빌어본다. 제발 내가 아는 것만 질문해 다오, 하고 말이다.


# 저마다의 자세


# 처음에는 열심히

조개가 너무 많아서 재미없다고 멀리 어디로 가버렸던 아우들이 돌아왔다. 한 녀석은 제법 큰 꽃게를 일곱 마리나 잡아왔다. 또 한 녀석은 희귀한 조개를 잡아왔고, 다른 녀석은 그 희귀한 조개가 사실은 “형이 잡은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거라니까”어쩌고 볼멘소리로 우겨댄다. 어른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여전히 생산적(?)으로 바쁘다.
“큰아빠, 큰아빠∼아.”
“뭐야, 왜에 또∼오.”
“저게 나를 때렸어. 때리고 도망갔어. 어, 또 때린다. 또 도망간다.”
우리의 꼬마아가씨는 물과의 전쟁이라도 선포할 모양이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큰아빠를 부르던 순간의 일은 벌써 잊어버리고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또 들어오는 바닷물에 떠있는 거품을 쫓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들어오는 바닷물이 자기를 때렸다고 주장하는 꼬마아가씨의 그 발칙한 상상력이 나는 또 부럽다.
발등을 간질이며 찰랑대는 물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딱딱한 것들을, 경직된 것들을 어루만지고 주물러서 걸쭉하게, 유연하게, 자유롭게 풀어주고 숨구멍을 터주면서 숨을 쉬어봐, 크게 한 번 숨을 쉬어봐,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물의 이 넉넉한 포용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물은 언제나 ‘그때의 그 물’인가? 수족관의 수중모터가 ‘아랫물’을 뿜어 올려서 공기에 노출시킨 다음 ‘새로운 물’로 만들어내듯이, 지구상의 모든 물이 그렇게 기압골이란 이름의 수중모터에 의해 부패할 만하면 허공으로 뿜어 올려져서 새로운 물로 재탄생하는 것인가?


# 조개가 익는 마당

최근의 과학적 성과를 믿고 따르자면 물은 그렇게 되돌이표로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저 멀리 아득한 은하계에서 얼음으로 구성된 별 하나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구의 대기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얼음이 산산조각이 나서 지구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결국 우박이 아닌가. 남극과 북극의 얼음도 녹고, 은하계에서 얼음덩어리들이 보태지기도 하고, 이러면 먼 훗날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 이런 문제는 너무 어지럽다. 어지럽다고 아주 외면해서도 곤란하겠지만, 너무 깊이 빠져들어서도 곤란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하루를 살아도 당신만 곁에 있다면 무섭지 않고 외롭지도 않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에 충실해야지 어쩔 것인가.  누군가의 신발 한 켤레가 밀물에 쏴아, 소리를 내며 밀려오더니 그대로 물에 떠서 둥둥 흘러 다닌다. 파도가 밀려올 때는 해변 쪽으로 곧장 밀려가지만, 파도가 다시 밀려나갈 때는 왔던 곳으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빠지다가 아래로 흐르다가 다시 뒤로 간다. 자전과 공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바다는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일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잠깐 해본다.
그러고 보니 조개도 항상 있던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칠팔 년 전에는 심원면 갯벌을 가득 채웠고 삼사 년 전에는 상하면 구시포 해수욕장 옆 갯벌을 채우더니 작년부터 해리면 동호 해수욕장 근처 갯벌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것 참, 조개들은 대체 어떤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




# 형제는 다정했다

집으로 와서 마당에 연탄을 피워놓고 잡아온 조개를 구워먹자 하는데 이게 또 묘한 구도가 되었다. 조개를 열심히 잡았던 축들은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듯 딴짓이나 하고 있는데 조개가 너무 많아서 재미없다고 갯벌에서 딴짓이나 해대던 축들은 금방 달라붙어서 “아따 시원하네” “겁나게 맛나네” 어쩌고 너스레를 떨어댄다. 그리고 아이들은, 녀석들은 이구동성으로 큰아빠를 불러댄다.
“큰아빠.”
“큰아빠∼아.”
“그네 만들어줘, 그네∼에”
와아 죽겠다. 왜 큰아빠만 찾는 거지? 작은아빠도 좀 찾고 그래라 요녀석들아. 좋으면서도 짐짓 싫다는 듯 짜증스럽다는 소리를 질러보는 나.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내 입을 막는다.
“큰아빠 집이니까 큰아빠를 찾지∼이.”
아아, 그래, 그렇구나, 참. 아이들은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구나. 오늘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오늘의 최고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구나. 그래, 좋다. 어쨌든 좋다. 이보다 좋은 일이 또 무엇 있겠느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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