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눈물




조막만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힌다. 대사를 읊느라 안면 근육이 조금 움직인 탓에, 충혈 된 눈 밑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이 뚝, 떨어진다.
브라운관에 비친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만 그녀가 좋아져 버리고 말았다. 얼굴도 예뻐, 연기도 잘해. 최고 아닌가! 여배우로서 미모와 연기력을 둘 다 갖추었다면 찬양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하긴, 내가 그녀가 연기하는 드라마를 전부 본 것이 아니라, 거실을 오가다 우연찮게 그녀의 눈물 연기만을 본 것이라 그녀의 ‘연기력’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 장면 하나로 그녀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눈물연기’ 마저 해낸 여배우라면, 연기력이 어느 정도는 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리라고 본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바로 눈물 연기 아니겠는가.
은연중, ‘얼굴만 예쁜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예쁜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보고, 난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녀가 좋아졌다. 꽤 인상에 깊게 각인된 모양이다.
여배우의 눈물, 머지않아, 다시 그녀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엔 드라마 상의 연기가 아니었다. 이튿날 신문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눈물로 사과’ 같은 기사가 올라왔다. 정말로 호소력 짙은 그녀의 충혈된 눈.
나는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면서, 대체 그 익숙함의 정체가 뭔지 알아내려 애를 썼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로 진짜 같았던 그녀의 눈물.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진짜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물. 글쎄. 둘을 구분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눈물에 의심이 제기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눈물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도 특정인물의 눈물이 연민에 호소하는 ‘쇼’라는 식으로 해석되곤 한다. 선거를 염두에 둔 쇼다,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정치인의 눈물에, 아 정말 많이 슬퍼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뿐인가 뭐 그리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당장 진리처럼 통용되는 ‘여자의 무기’설도 있으니까. 눈물은 여자의 무기라고.
나의 몇마디 말에 울음을 터트린 여인에게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령 여인의 잘못임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대개 이런 경우, 여자의 잘못을 책망하는 일은 2순위가 되어버린다. 지금 당장 가장 위급한 사항은 이 여인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일이니까.
이런 일도 있었다. 내 친구 K모양은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에 여우같은 성격을 겸비한, 천상 연애쟁이다. 그녀는 가식에 능하고, 거짓말에 능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이러한 그녀의 능력들은 그녀를 유능한 바람둥이로 만들어 주었고, 때로 그녀의 양다리가 발각된다 해도 능구렁이처럼 잘 모면할 수 있게 해줬다.
내가 종종 “이 못돼 먹은 가시내” 하고 욕을 해도, 흐흥 웃으며 “사랑이 많아서 그래, 그건 그렇고…” 하며 자신의 모험담을 풀어놓던, 그런 여인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여지없이 기존 남자친구 외에 또 다른 남자친구를 하나 더 만들었고, 눈치 백단 그녀의 활약으로 그의 존재는 영원히 비밀로 간직될 것만 같았…지만! 꼬리가 길면 들킨다고 사소한 실수로 발각 되고 말았다. 이번이 초범도 아니었던지라 그녀의 기존 남자친구는 굉장히 화가 났다. 애교, 동정심 유발,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봐도 이번엔 정말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굳은 표정의 남자친구 책망에, 최후의 수단,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허둥대며, 되려 ‘내가 잘못 했어’ 하고 눈물을 닦아줬다나 뭐라나.
이 얘길 자랑스럽게 들려주는 K모양에게, “이 여시 같은 가시내” “독사 같은 가시내” 욕을 했지만 역시, 그런 걸로 타격을 입을 것 같았으면 양다리 같은 짓을 벌일 리가 없었겠지. 그녀는 생글 생글 웃으며 동그란 눈으로,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순진해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독사 같은 기집애.
이런 일이 왕왕 있다 보니 사람들이 더 이상 눈물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눈물의 진실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을까.
눈물은 그야말로 진실한 감정의 표현, 아니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진실한 감정의 ‘범람’이라는 편이 더 적합하겠다. 슬픔이 적을 때야 말로써 표현하거나 혹은 슬프지 않음을 위장하거나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어지고, 그보다 더 극심해 질 경우엔 눈물이 흐르게 된다.
설령 슬퍼도 표정을 숨기고 미소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것은 꽤나 힘이 드는 일이다. 감정이 극심하여 범람하는 것이 눈물이다.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너무 기쁘거나, 너무 화가 날 때도 눈물이 난다.
나 같은 경우는 아침에 너무 일어나기 싫을 때도 눈물이 난다. 짜증이 극심하여 유발된 눈물이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이 노출되어 버릴 만큼 진실성 있는 것이 눈물인데, 어째서 이것이 이렇듯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을까.
아무리 요즘 애들은 약았다 약았다 해도, 그나마 순수한 어린애들은, 눈물은 여전히 진실함으로 통용된다.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싸움에 진 것이고, 아무리 짓궂은 아이도 친구가 울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는다. 어린애들답게 가장해야할 더 복잡한 일들도 없지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눈물이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사항이라는 점이다.
눈물이 믿지 못하게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천진난만했던 어린이들이 자라나면서 점차 남을 믿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엔 가장하기 쉬운 ‘말’을 믿지 못하게 된다. 타인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자각. 본인도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 남들도 거짓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만큼 거짓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쉽다.
조금 더 자라면 표정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지금 나를 향해 웃는 사람이 정말로 내게 호의를 가지고 웃고 있는 건지 말이다. 조금씩 사회화 되면서 상황에 맞게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재미가 없어도, 맘에 들지 않아도, 미소 짓는 법 같은 것들. 말을 믿지 못하고, 표정을 믿지 못하고, 더 나아가 행동 역시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마지막 보류, 작위적으로 컨트롤하기 힘든 눈물조차,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웃음을 순진하게 호의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즘 같은 세상에 뒤통수 맞기 딱 좋은 사람이다. 물정도 모른다며 쯧쯧 혀를 찰 일이다.
가식과 가면. 어쩌다가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나. 진실함이 불필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현실의 불편한 현실. 어쩌면 가장 그럴듯한 ‘껍데기’를 지닌 사람이 가장 ‘사회적’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상황에 맞게 작위적인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사회화된 사람이 아닌가.
이 불편한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 어린 아이의 순진함을 가장 효율적으로 잃은 사람.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 사회화의 반증인 것만 같다.
표리부동이 더 이상 욕도 뭣도 아닌 이 사회의 현실. 어른이라면 당연히 표리부동해야하는 것 아닌가. 당장 나만해도 내 윗사람의 전혀 웃기지 않은 개그에 배를 잡고 깔깔 웃는다. 전혀 관심도 없는 얘기를 심각한 표정을 하고 듣는 척 하지만, 실은 오늘 점심엔 뭐 먹지 따위나 생각하고 있고. 상사 앞에서 뚱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 개그 센스 꽝이네요, 내지는 저 그런 얘긴 관심 없어요 딱 잘라 말하는 것보다야 조직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역시 입맛이 쓰다.
어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타인의 웃음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간의 관계는 점점 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내 말에 웃어주는 것이 정말로 웃어주는 게 아니라면, 나 역시 타인의 웃음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될 것이고, 어쩌면 그런 웃음 같은 건, 바라지도 않게 되어버릴지 모른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평화를 지키고자, 텅텅 빈 대화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미소. 그리고 모든 진실은 후방에서 은밀하게 교환된다.
눈물을 보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저 사람이 무슨 의도일까’ 가 아닌 ‘저 사람이 정말 슬프구나!’, ‘힘들었겠다’ 표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다운 순수함을 모두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도래했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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