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벌, 벌, 벌과의 한철 아홉 번째 이야기


# 나날이벌집

대구에서 시흥으로 봉장을 옮기고 첫 번째 채밀을 하던 날, 그날은 참으로 신나고도 부끄럽고 민망하고 당혹스럽게 참혹한 날이었다. 마음이, 감정이, 심사가 그렇게도 자주 시간 단위로 변한 경우는 지금 생각해도 태어난 이후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벌 농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피식피식 웃어대며 “저런 피어∼엉신들” 소리를 열 번도 넘게 쏟아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명색이 양봉업자랍시고 벌통을 싣고 다니는 주제씩이나 되면서 꿀을 따던 날 꿀을 담을 그릇조차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배포라는 것이 형편무인지경으로 작았다고나 할까, 그런 셈이었다. 사실 우리는 대구에서의 수확을 기준으로 용기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대구의 아카시아 꽃에 꿀이 없다는 ‘산적’의 해석을 우리가 그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인지 하여튼 대구에서 20리터들이 6통이 나왔으니까 시흥에서는 많아봐야 그 곱절을 넘기지 않을 거라는, 곱절만 나와도 그게 어디냐 하는 마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20리터들이 말통 열다섯 개를 사다 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첫 판부터 꿀이 쏟아진다 싶더니 작업을 절반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준비한 용기를 다 써버렸다. 그것을 알고 부랴부랴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서 꿀통을 추가로 구입하기로 했으면 넉넉하고 배짱도 좋게 50여 개, 아니 최소한 20개쯤은 사올 법도 하건만, 우리는 그때 무슨 ‘찌질이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인지 고작 10개를 사들고 와서 다시 채밀을 시작했다. 그러니 이걸로 벌통을 몇 개나 정리할 수 있었으랴. 한 시간도 안 되어 다시 꿀통을 사러 시내로 나가야만 했다.
“아니 이게 대체 뭔 오갈바가지라냐. 아따 이것 참 웃긴다 이거 잉?” 진실로, 참으로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은 실실 절로 나오는 맹랑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뭐 그저 웃지요, 식의 해설픈 웃음은 절대로 아니고, 씩씩한 웃음이 절로 터지는 난감인 것이었다. 야 이거 이러다가 떼부자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식의 미망에도 살짝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전혀 뜬금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시비하고 나섰다.
“이제 보니 초짜들이신가 봅니다? 아니 이렇게도 준비성이 부족해서야 원.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쩝.”


# 능소화

인력소개소를 통해서 나온 사람들, 그러니까 흔한 말로 하자면 인부들이었다. 채밀은 기본적으로 다섯 명은 필요한 작업인데 우리는 후배와 나 그렇게 단둘뿐이고, 해서 며칠 전부터 인력소개소에 전화를 해서 섭외를 해두고 있었다. 하루에 일당이 얼마인데 실제 작업하는 시간이 얼마든 무조건 하루 일당을 달라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채밀은 시간이 많아야 다섯 시간이고 보통은 서너 시간에 끝난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오전에 채밀작업 끝나면 오후에 다른 현장에 일 나간다고, 요컨대 두 탕을 뛰게 되었다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벌이 무섭다고, 여기저기 몸에 마구 침을 꽂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쩔쩔매며 사고나 치던 사람들이 삼십 분 지나고 한 시간 지나면서 아주 도사가 되었다. 도사도 무슨 일을 잘하는 도사가 아니라 ‘통박’을 굴리는 쪽으로 도사가 되어서는 아주 그냥 ‘주인님’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깐죽거리는 그런 쪽으로 도사가 되어 버렸다. 이 몹쓸 도사들로 인해 우리의 체면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 한련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라도 정신을 바싹 차렸더라면 그날 하루가 그렇게까지 민망하게 참혹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살짝 미쳐 있었다. 준비한 통 열다섯 개를 다 채우고 모자라서 통을 두 번씩이나 사러 나서는 벌치기 유목이란 이게 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박이 터진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한다 해도 수치는 잠시잠깐일 뿐이고 즐거움은 영원할 수 있다는 느닷없는 사상에 우리는 아마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력소개소에서 나온 인부들의 경고(?) 따위는 금세 잊어버렸다.
12시 30분쯤 채밀을 종료하고 헤아려보니 무려 스물일곱 통이었다. 세상에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2.4킬로들이 꿀병에 소분을 한다면 도대체 몇 병이 나오는 것이냐. 암산이나 손가락으로는 머리가 나빠서 도저히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얌전하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력소개소에서 나온 인부들이 돌아갈 때 일당 외에 따로 꿀 한 병씩을 듬뿍듬뿍 퍼주고, 점심 먹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우리는 차를 몰고 봉장을 떠나면서 여기저기에 마구 전화질을 해댔다.


# 물망초

그랬다. 이것은 정녕 사건, 여기저기 마구 자랑을 해야 할 사건이었다. 희망이 없다고 쪼그리고 앉아서 개미나 죽이는 이 땅의 수많은 절망한 영혼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창하게 무슨 국위선양을 위한다는 측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 자신이 살아서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랑을 하고 다녀야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후배녀석의 자동차 클라이슬러에 장착된 네비의 아가씨가 일러주는 대로 이쪽으로 가라 하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라 하면 저쪽으로 가면서 끝없이 전화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가서 우리의 실력(?)을 보여줘야 할 상대는 역시 ‘산적부부’였다. 대구에서 우리가 겨우 여섯 통의 꿀을 수확했을 때 드럼통으로 두 개 이상이나 건져올린 그들 부부에게 우리는 세 드럼 가까이나 꿀을 땄다고, 일단은 자랑을 하고 그 뒤에 뭔가 가르쳐줄 일이 있으면 가르쳐준다는 그런 짜릿짜릿한 생각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 인천광역시 관할의 무슨 돼지농장 주변에 봉장을 차렸다고 하는 ‘산적부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뭐냐. 네비의 아가씨도 찾아내지 못하는 오지 중에 오지라서 마중을 나온다고 나온 ‘산적’을 만나서 악수 한 번 하는 사이에 우리의 결기와 의기는 홍수 만난 모래성처럼 삽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나온 인사말 한 마디, “아이고 어떻게 꿀 좀 보셨습니까?” 하고 우리가 말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우리는 세 드럼 가까이나 그냥 얻어버렸습니다”하는 말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산적’이 야속하게도 그 순간, 그 짧은 틈을 타서 먼저 입을 열어버렸다.
“하이고 우리는 그놈의 꿀, 물인지 꿀인지 하여튼 열세 개나 봐 부렀당게.”
이게 뭔 소리냐? 열세 개라니. 설마 20리터들이 말통으로 열셋이란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드럼통으로 열세 개? 그것을 아마도 기시감이라고 하는 걸게다. 모르지만 이미 알고 있는, 알고 있다는 느낌. 그놈의 느낌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부터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뭔가 말을 하기는 했겠지만 자기가 하고서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기억할 수 없는 옹알이 같은 것이나 겨우 내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 왕고들빼기

대구에서 올라온 뒤로 나흘 동안 이틀에 한 번씩 두 번 채밀을 했고 열세 드럼을 수확했단다.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거짓말 따위에 정신을 쏟을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산 증인이 있고, 증거가 있었다. ‘산적’의 고향 함평에서 소일거리 삼아 따라 나섰다고 하는, 벌통 스무 개를 가지고 따라와서 단번에 대박을 터뜨렸다고 웃음이 한 말인 72세의 할아버지랄까, 아저씨랄까, 하여튼 머리가 올백인 남자가 곁에 있었다. 그가 말했다.
“하이고 참말로 내가 미치겄당게, 이것이 먼 일인지 나도 모른당게.”
벌통 20개로 지난 나흘 동안 두 번 채밀을 해서 4드럼을 얻었단다. ‘산적’은 양이 많아서 트럭에 실어 모두 보내버렸지만 그는 아직 현장에 두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밀어도 움직임이 없는 아주 묵직한 드럼통을 그는 손으로 탁탁 때리면서 지껄여댔다. 그게 꿀인지 물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꿀은 꿀인데 꿀이라고 믿을 수가 없어서 그냥 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와아, 진짜로 돌겠네, 돌겠네, 돌아버리겠네. 아 이 낮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거, 응? 후배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눈치나 흘끔흘끔 살피며 왔다 갔다, 건들건들, 비틀거리고나 있어야 했다. ‘아내산적’이 손님이랍시고 커피를 끓인다, 과자를 챙긴다 부산을 떨고, ‘남편산적’이 옆에서 “모싯잎 송편 그새 다 먹어부렀는가?” 어쩌고 역시 부산을 피우고 있었지만 우리는 글쎄,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정녕 사람 세상은 아니고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소굴인 것만 같아서 눈을 뜨고 무엇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참혹했던 그날의 일기에서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사르트르를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의 걸작 구토를 읽은 뒤에 나는 얼마나 흥분했던가.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모르는 중대한 것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거대한 착오에 빠진 채로 허둥거린 날수가 얼마였던가. 이박삼일로 술만 마셔가며 잠도 안자고 지껄여도 끝나지 않던, 끝을 낼 줄 몰랐던 연설 아닌 연설, 토론 아닌 토론, 그 주마간산의 정신이 아직도 내게 있었구나,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열을 안다고 날뛰었으니, 오, 이런 빌어먹을, 이런 빌어먹을.’


# 참나리

고맙게도 ‘산적’은 우리의 수확량에 대해서는 물어봐주지 않았다. 묻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수확량에 대해서도 이미 감을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산적’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아내산적’ 역시 우리의 근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 또한 고마운 일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사람들이 필경 ‘너희들 실력 뻔하지 뭐’하는 그런 생각들인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속이 상해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런데다 ‘아내산적’은 또 무슨 반가운 정이 그리도 많다고 자발자발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귀에 들리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어서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면서 박장대소라도 할 일이다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뭐냐 이거, 당신들이 꿀을 열 드럼도 넘게 땄다 해서 우리를 이렇게 약올려도 되는 것이냐 하는 뭐 그런 못난 심사.
그런 못난 심사인 채로 딴 생각이나 하다 보니 문득 돼지똥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와아, 세상에 이게 뭐냐. 전후좌우 사방이 온통 돼지똥 천지였다. 우리가 밟고 들어온 길도 돼지똥 길이었고, ‘산적부부’의 그 유명한 더블침대가 놓여 있는 텐트도 역시 마른 돼지똥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결단코 현대식은 아니고, 재래식도 저 먼 태고적 시설이라고나 해야 할 돼지농장이 오백여 미터 사이에 두 개가 있는데 각 농장마다 이천 마리 이상의 돼지를 치고 있다고 했다. 그 현장의 중앙에 ‘산적부부’의 봉장이 있었다. 돼지 농장에서 똥을 퍼다가 밖에 쌓아두고 말리는데 비가 오면 이것들이 천지사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변에 빼곡 들어찬 아카시아 나무들을 살찌워서 꽃을 무성하게 피게 하고, 그 꽃에서는 또 꿀이 무지하게 들어 있다는 얘기였다.


# 참무궁화

‘산적부부’는 그 질퍽한 돼지똥들 사이에 어찌어찌 용케도 대형텐트를 설치하고, 예의 더블침대를 들여놓고, 싱크대에 목욕통 따위 살림살이를 갖추고, 그리고도 남은 자리에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알태기’ 떨어진 유리 탁자 하나에 찢어진 비닐 안락의자까지 다섯 개나 들여놓는 식의 이를테면 접대용 거실까지 꾸며놓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우리더러 하루에 꿀 세 드럼씩 따게 해줄 테니 이런 곳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죽었지 죽어도 못 살 것 같았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이렇게 해서 드러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후배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대며 어서 빨리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마디씩 지껄였다.
“에이, 함평 촌놈들.”
“징허다, 징혀. 아니 으찌케 저런 곳에서 산다냐?”
“아따 형님도 참, 사람이 아니랑게요.”
“맞어, 사람이 아니여. 우리는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려 했으니 이게 응?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거였던 거여 잉?”
우리로서는 드디어 ‘껀수’를 잡은 셈이었다. 못난 놈들이 주인 있는 데서는 ‘짹 소리’도 못하고 없는 데서 왕 노릇을 하더라고, ‘산적부부’의 봉장을 빠져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끝도 없이 그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며 실컷 원풀이를 해버렸다. 그리고는 “함평 촌놈들 다시는 상종을 말자”고 맹세를 하고, 고창에서 올라온 ‘양반’ 대성양봉 주인이 봉장을 꾸렸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이것은 또 뭔가. ‘양반’이라 여겼던 대성양봉 또한 양반이 아니었다. 벌통 40개로 일주일 동안 꿀을 아홉 드럼이나 얻었다는 그는 인천 문학경기장이 근사하게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서 완전히 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산비탈에 먼 친척이 가든 명색의 식당을 하고 있었다. 공원지역이라 식당 운영 같은 것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워낙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고, 딱 그 자리만 사유지인 까닭에 아무 거리낄 것 없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 식 장사를 하는 가든이었다. 이 가든에 딸린 방 한 칸을 대성양봉 주인이 단독으로 쓰며 목욕이든 텔레비전이든 맘 내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그 모양이 또 우리를 어마어마하게 속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와아 참, 이게 도대체 뭐냐 이거. 다들 어떤 식으로든 자리가 있었단 말이지? 우리만 아무 자리도 없고 그래서 뒷북만 치고 다니는 것이다 이거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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