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선운사에 피어난 사랑의 꽃무릇




이순의 사랑

“야! 붉은 세상이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시선 닿는 곳 어디나 온통 붉은 사랑의 색이다.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경이의 극치다. 사랑의 극치다. 입이 닫히지 않는 장관이다. 위대한 사랑의 승리다. 사람의 힘으로 꾸밀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위대한 승리다. 놀랍기만 하다.
사랑의 꽃무릇이 피어있는 곳은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사다. 선운사 경내는 온통 꽃무릇 천지다. 붉은 빛깔의 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틈 하나 남겨 놓지 않고 피어난 붉은 사랑의 꽃들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꽃무릇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상징한다. 꽃무릇보다 더 일찍 피어난 꽃도 있다. 한 달 전 피어난 상사화다. 꽃무릇은, 연분홍으로 수줍은 듯 피어나는 상사화와는 다르다. 상사화는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에 반해 꽃무릇은 부끄러운 것도, 주저하는 법도 없이 당당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태도다. 당당하게 얻기 위하여 온몸으로 표현한다.
꽃과 이파리가 만나지 못해 애틋한 사랑의 꽃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더 가슴에 와 닿고 애절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밖으로 발산할 수밖에 없는 꽃의 서러움이 엿보인다. 붉은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자고 있는 내 안의 사랑도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 사랑이란 말은 다소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가는 세월에 삭아지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랑도 마찬가지다. 세월을 비껴갈 순 없다. 이순의 나이에 사랑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입에 담는다는 자체가 주책임이 분명하다. 그런 줄 잘 알면서도 붉은 사랑의 꽃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설렌다. 이유가 뭘까?





바래버린 사랑에도 힘이 남아있단 말인가? 화석이 돼버린 사랑에도 설렘이 남아있단 말인가? 두근거리는 설렘을 진정시키며 생각해보지만 고개가 옆으로 갸웃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과 행동에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은 분명 이제 멀어져 간 과거의 일일 뿐이다. 열정은 모두 사그라지고 하얀 재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정이 넘치던 시절엔 사랑의 힘이 솟구치는 게 당연하다. 그때는 바라만 보아도 힘이 솟구치고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순의 나이에 느끼는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붉은 사랑의 꽃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보고 놀란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는 스스로를 보며 망연자실해진다. 아직도 설레는 사랑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꽃무릇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한을 가슴에 품었기에, 더욱 더 붉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더욱 더 애틋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의 사랑도 그러한 것일까? 이순의 사랑은 열정이 부족해서, 행동으로 옮길 수 없어서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래서 더욱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순의 사랑은 완벽한 사랑이 되기 어렵다. 미완의 사랑이거나 짝사랑, 외사랑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선운사에 피어있는 사랑의 꽃무릇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고운 꽃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더 마음이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열정이 넘쳐흐르는 젊은이의 사랑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꽃무릇이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바로 이순의 사랑과 같기 때문이다. 아∼얼마나 애절한 사랑이란 말인가?





고령화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삶은 처절하다. 핵가족화로 인해 자녀들의 공경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지 오래다.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을 수 없는 세대가 된지 오래다. 이순의 사랑은 이런 외로운 노인들의 사랑이다. 노인들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더 절절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사랑이 모두 다 절절한 줄은 알지만, 이순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하다.
붉은 사랑의 꽃무릇을 바라보면서 떠올려본 이순의 사랑. 사랑은 숭고하고 성스러운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바로 이순의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외로움에서 피어나는 사랑이어서 그렇고, 고독 속에서 고고하게 피어나는 꽃이 바로 이순의 사랑이다. 붉은 사랑의 꽃을 바라보면서 노인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원해본다.

알알이 영그는 가을

멀리서 보아도 먹음직스럽다. 한두 개가 아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려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린 열매들이 풍요로움을 자랑한다. 색깔도 변하고 있다. 연둣빛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신비로움이다. 이 놀라운 생명의 경이로움은 오직 자연만이 해낼 수 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무엇이든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바뀌고 있다. 한낮의 작열하는 햇살이 모든 것을 창조해내고 있다. 가을날 하루의 햇살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특히 올해처럼 비가 많이 내려 일조량이 부족한 때에는 더욱 더 그렇다. 가을날의 햇살이 그동안의 부족한 것들을 알차게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얼마나 고마운 햇살이란 말인가?



대추나무는 아파트 화단에서 자라고 있다. 대추나무가 대단위로 경작되고 있는 곳이라면 또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거하는 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에 위치하고 있으니 느낌이 새롭다. 정녕 가을이라는 점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가을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란 점을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출렁이는 대추를 보며 문득 나를 생각해본다. 흘러가버린 지난날을 생각해본다. 새해를 맞이하며 굳게 다짐하였던 일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점검을 해야 할 때다. 가을이 가기 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가을에 마무리를 하지 못한다면 올해에는 결국 할 수 없게 된다. 겨울이 있기는 하지만 겨울은 마무리하는 계절이 아니다. 겨울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다. 하나 같이 모두가 미완인 채로 남아 있다. 새해 다짐하였던 일들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비웃고 있을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내 탓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도망부터 치고 있다.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 아니라며 변명만 늘어놓으려고 한다. 이것은 이런 이유로, 저것은 저런 이유로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핑계를 대려 한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내가 게으른 탓이고 무능한 탓이다.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알차게 여물어가는 대추를 보며 자성해본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지금부터라도 보완하여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롱나무 꽃의 향기

크지 않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 아파트 화단 앞 자그마한 나무에 연분홍으로 피어났다. 크고 장성한 나무의 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 조금도 아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앙증맞은 나무에 꽃이 피어났으니 느낌이 묘하다. 아마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워낸 듯하다. 꽃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으니 가지게 되는 느낌 또한 묘하다.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 ‘원숭이가 미끄러지는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껍질이 없이 반질반질하다. 그러니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도 아래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나무들은 오래 될수록 껍질이 갈라지고 부셔져서 보기에 흉하다. 그에 반해 껍질이 없는 배롱나무는 반질반질하니, 바라보기에도 아주 곱기만 하다. 시집 안간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배롱나무 꽃을 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이 피어나서 백일 동안 피어있다는 의미이다. 꽃을 들여다보면 작은 꽃들이 모여서 하나의 커다란 꽃을 이룬다. 한쪽에서는 피어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진다. 그러니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지속적으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로 힘을 합쳐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배롱나무는 간지럼나무다. 참으로 묘한 나무다. 나무 한쪽 끝을 간질이면 반대편 방향에 있는 나무가 참지 못하고 몸을 떨어대는 것이다. 믿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여느 나무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다른 기능을 하는 나무이다. 그 중에서도 작은 나무에서 피워낸 꽃이니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롱나무가 처음 꽃을 피워냈다는 것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지금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흘러가는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가는 세월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만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난감해진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나는 그냥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쫓아내고 있다. 가지 않는 시간을 어서 가라고 몰아내고 있다. 허망한 일이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한정된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지는 못할망정 쫓아내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유용한 일을 해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삶을 알차게 채워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나 자신과 이웃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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